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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Nov 04. 2020

명명, 기억, 관계

중요하다면서 잘 모르고, 무관심하다면서 의식하는 그것.

  지난 시간들의 기억들을 하나씩 들추어 본다. 부모님, 연인, 친구, 동료, 동반자, 아이, 그 밖에 스쳐 지나갔던 많은 사람들과의 기억들.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 생각이나 감정들. 만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오직 나뿐이라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얻은 기억이나 생각 그리고 감정들을 제외한다면, 무엇이 남게 될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공허함 뿐이다. 나 아닌 타인들, 나의 일상에 인접해 있으면서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내가 어떤 답을 하든 그 답은 타인의 관여가 전혀 없이 온전하게 자기 안에서 사유한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관한 생각과 감정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과의 관계로 인한 자극을 해석해 낸 결과이다. 분명히 살아오면서 수많은 관계에 노출되었고 그것이 내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관계라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은 잘 몰랐고, '관계에 무관심하다'라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사람은 하나의 점이고,
관계란 점과 점을 잇는 선이다.


  광활한 백지 위의 점을 인식하기란 매우 어렵지만  점이 이어져 선이 되는 순간, 선의 양끝에 존재하는 점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 각각의 점은 별개이기 때문에 온전하게 서로를 안다는  불가능하다. 다만 연결된 선의 물결이 만들어낸 잔상으로 서로가 연상하는 것을 투영하여  수는 있다. 투영된 것이 각자의 연상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습을 드러낸 잔상들에 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잔상들은 구체화되고 이름이 붙으며 기억이 생겨난다.



  나와 가까운 사람으로 시작해 아주 멀리 있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상이 없다면 잔상도 투영도 생겨날 수가 없다. 이름을 붙일 수 없고 기억될 수 없으며 고로 존재할 수가 없다. 산다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관계란 모두가 서로 간에 선으로 이어져 각자의 존재를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태생적 자폐로 태어난 인간이
존재로 살기 위해 평생 배우는 건,
그것이 무엇이라 명명되고
기억되든 간에 결국 관계다.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얻어진 생각들, 나는 무엇을 배웠으며 어떤 생각을 나의 가치관으로 고착화시켰을까? 최초의 기억이 생겨났던 시점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떠올릴 수 있는 관계 안에서 굳어진 생각들은 감정적인 친밀감의 정도와 상관없이 유사한 것 같다. 마치 치밀한 반복학습 과정을 밟아온 것처럼.


  내 안에 쌓인 관계의 결과물에 대해 하나씩 들여다 보자니 시작도 하기 전에 '식상함'이라는 느낌이 몰려온다. 아마도 이 느낌이 괜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관계'라는 주제를 언급하여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나 식상한가'라는 것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다.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래전인데도 아는 것과 상관없이 매번 같은 경험을 반복하고 같은 느낌을 되새기게 된다면 그 반복이 삶에 관여하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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