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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Nov 17. 2020

되려하지 않는 날을 소망한다

소망의 역설

  책을 사서 좀 읽다가 무언가의 이유로 끊긴 후, 읽던 부분까지 표지로 마킹한 채 시간이 지나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책장 앞을 서성이며 읽은 만한 것이 없을까 기웃거리다가 문득 자그마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이 책을 샀을 때에는 꽂히는 것이 있었을 텐데 그것이 뭘까 하다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라는 문구에 시선이 멈췄다. 아마도 이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좋아한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 그것을 일상처럼 할 수 있는 어느 날이 내 미래가 되기를 꿈꾸기도 한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틈틈이 그런 것을 해 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주 오래간만에 고객과 미팅을 하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와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로 수입을 얻고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을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을까?"로 시작해서 "더 이상 수입이 생기지 않아 지기 전에 제2의 직업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해야 노년을 궁핍하지 않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마땅한 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으로 이어지다 보니 나라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 아무것도 세워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불안했다. 때때로 한정적인 돈을 가지고 연명하며 지내는 미래를 상상하면 '수명이 길어졌다'는 말이 '수감 생활이 길어졌다'로 들리기도 했다. 그러다 뭔가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억하는 한 '안정적인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며 살아가는 일'을 해 온지가 꽤나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또 다른 다음 계획을 종용받아야만 하는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어서였다.


  스스로 먹고사는 일의 효용이 다 사라져야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소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것일까. 동료와의 대화 초반은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고개만 끄떡이거나 단답형의 맞장구만 쳐주게 된 것은 내 안의 들끓는 생각들 때문에 속이 매스꺼워졌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이런 종류의 주제를 여기저기서 주워듣게 된다. 그럴 때마다 속이 편치 않았다.


 과거의 나는 "먹고살기에 충분한 재산이 생긴 다음에도 여전히 일을 하겠노라"라고 단언했었다. 그때는 일이 나 자신을 증명하는 도구였고 성취감의 출처였다. 지금은 아니다. 충분한 재산이 생긴다면 가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백수로 살 것이다. 세상에는 수입을 얻기 위해 해야 하는 행위 말고도 해 볼 만한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자리 잡으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일이 노동이 되어 버렸다. 증명의 도구이자 성취감의 출처였던 쓸모가 다 닳아 없어져 버렸다.


일이 없는 나날들을 소망한다
무언가가 되려하지 않는 날을 소망한다


  일없이. 어느 날은 너무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피어 올라서, 어느 날은 너무나도 무료함에 찌들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지내는 그런 날들 속에 살고 싶다. 생활이 나를 쫓거나 갑자기 튀어나와 가로막지 않는 그런 삶. 아마도 다시 눈에 들어온 이 책은 이런 생각들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요동치던 날 사게 되었을 것이다. 표지로 마킹이 된 채 방치된 것은 무언가로부터 방해받은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는 것일 테고 말이다.  


  단숨에 들었던 책을 읽어내고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가만히 눈을 감았을 때, 초록색 풀이 무성한 곳에 하얀 네모 박스로 지어진 건물에서 빠져나와 느리게 한 발자국 씩 걸어 나가는 내가 보인다. 그건 내가 지금의 일터로 이직하기로 결정하고 난 후 출근을 하기 전날 꾼 꿈의 기억이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일이 없는 나날들을 소망하기 시작한 것이.


  어린 시절 무언가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준비해야 될 때 문득 이미 바라는 것이 되어 버린 나로 훌쩍 시간을 가로질러 가기를 바랐던 것처럼,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도 되기 위해 생활을 버텨가야 할 때 이미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좋은 나로 훌쩍 시간을 가로질러 가기를 바라게 되는 것 같다. 결국 무언가가 되려다 다시 무언가가 되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게 삶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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