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국을 보았다>
"생존율 10%의 뇌사상태에서 죽음을 체험하고 돌아온 하버드 신경외과 의사가 최첨단 뇌과학 이론과 의학적 추론으로 영혼, 신, 죽음의 실재를 입증하다!"라고 책의 표지에는 기술되어 있다. 어떤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이 책을 썼다는 것보다도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의식은 뇌의 부산물일 뿐이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이 경험한 '의식의 실재'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왜 그것이 실재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그 점이 이 책의 가장 독특한 점이었다.
에릭 헨슨의 <아닌 것>이라는 시에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중략)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요새는 그 말이 정말 와 닿는다. 지난 시간들 속에서 내가 읽거나 믿었던 것들과 지금의 내가 읽거나 믿는 것들은 사뭇 다르다. 변해왔다고 할 수도 있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서로 다른 나라고 할 수도 있으며, 모두를 포함한 나로서 변하거나 다르거나를 판명할 수 없는 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뉘앙스로써 영화 <미인도>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스토리 상에서의 뜻은 차지하고 이 말은 많은 울림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지금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이 물질적인 나를 초월한 진정한 나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명,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지금의 세상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것들을 보고 싶어 했다.
물론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전과 다른 몸과 마음을 느끼게 되고, 그런 이유로 죽음이라는 것이 아주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기 때문인 점도 있다. 그리고 나의 겉모습, 타인에게 보이기를 원하는 이미지, 왜 고집했는지 모르게 되어 버린 편향들이 내 안에서 힘을 잃어가면서 조금은 생각이 자유로워진 이유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고, 그것에 대해 알고 싶다는 욕구가 급상승한 것'과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나만의 무엇을 만드는 것보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 즉 타인들에 의해서 포착된 세상을 보는 것에 마음을 더 빼앗기게 된 것'인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는 내가 믿었던 것들을 내게서 빼앗아 가면서 내가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들을 보게 만들어 주었다. 그건 뭐랄까? 나의 뇌를 리셋하는 기분과도 같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의 기존의 관점이 무언가에 의해서 아주 크게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해서 요새는 내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보려고 하는 것, 그 대상을 물끄러미 따라가 보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을 느끼게 만드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약이나 술과 같은 것이 결국 도파민 중독의 일환이라는 관점이라면, '앎'에 대한 것 역시도 내게는 비슷한 중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일차적으로 그가
자아로부터 해방된 정도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저자는 아인슈타인에 대한 흠모를 얘기했었다. 과학자로서 그럴만하다고 생각하는데, 때때로 나는 인문학 관련 서적에서 그(아인슈타인)을 만나곤 한다. 그때마다 그의 말들은 과학 그 이상의 메시지였던 기억이 있다. 이 책에 나온 이 말 역시도 그렇다. 살면서 진정한 자아와 마주하는 일도 쉽지 않다고 보는데, 이제 겨우 자아와 마주해 볼까 싶은 생각이 드는 시점에 그것과 마주했다면 그다음에 할 일은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참 매혹적이다. 무언가에 대한 것 그 다음의 무엇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말이다.
내가 오래 머물렀던 문장들을 적어 본다.
구체를 통해서 옴(om)은 내게, 우주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 상상 이상으로 많은 수의 우주들이 있는데, 그 모든 우주들의 기저에는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다른 우주들에서도 악이 존재하지만 아주 적은 양의 흔적을 남길뿐이다. 악이 불가피한 이유는, 악이 없으면 자유의지가 불가능해지고 자유의지가 없으면 우리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신이 염원하는 그런 모습으로 되어갈 기회가 없게 된다. 우리의 세계에서 때로는 악이 끔찍하고 매우 강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더 큰 그림에서 본다면 사랑이 지배적이고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했다.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우주들 속에 무수히 많은 생명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중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지성이 진보된 존재들이 거주하는 우주들이 있었다. 보다 높은 차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이들 차원을 알기 위해서는 그 안에 들어가 직접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 고차원 영역에서도 원인과 결과는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을 넘어선 것이다. 지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는 이들 고차원 세계와 긴밀하고도 복잡하게 맞물려 있다. 다시 말해, 이 세계들은 우리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세계들은 일체를 주관하는 신성한 실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고차원 세계의 존재들은 우리 세계의 어떤 시간이나 공간으로도 접근할 수 있다.
<중심근원을 만나다.>
우리의 뇌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화려한 무늬의 디지털 직물로 변형시켜 외부 현실을 모형화한다. 하지만 우리의 지각은 모형일 뿐이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환상이라는 뜻이다. (중략) 우리가 더 높은 세계의 앎에 접속하는 것을 뇌가 실제로 어떻게 방해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뇌 자체가 의식능력을 생성하는 것이 아님을 잠정적인 가설로서 나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즉 뇌는 일정의 밸브 또는 필터로서, 우리가 영적인 세계에서 지니는 보다 광대한 비물질적 의식을 지상의 삶에 적합하게끔 제한된 능력으로 축약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 아주 명백한 이점이 있다. 우리의 뇌가 주변의 물리적 환경으로부터 빗발치는 감각과 정보들을 어느 정도 걸러내고 실제로 필요한 재료만을 선별하기 위해 삶의 매 순간마다 열심히 일하는 덕분에, 우리는 자신의 초지구적 정체성을 망각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더 효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뇌가 그것을 방해한다>
우리의 진정한 내면의 자아는 완전히 자유롭다. 그 자아는 과거에 행한 일들 때문에 위축되거나 체면이 손상되는 일이 없으며, 신분이나 지위를 염려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명성, 재산, 업적 등을 통해서 자아를 구축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중략)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이 영적 자아이며, 신은 사실상 우리가 이러한 존재가 되기를 진정 바라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참다운 영적 자아에 가까이 이를 수 있는가? 사랑과 연민을 실천하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왜 그러한가? 사랑과 연민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선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세계의 구성성분 자체가 바로 이러한 사랑과 연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뇌가 그것을 방해한다>
1920년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라는 물리학자(그리고 그 밖의 다른 양자역학의 선구자들)가 발견한 원리는 참으로 이상한 내용이어서 세상은 아직까지도 이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원자 속에서 발견되는 현상들에서는, 관찰자(즉 실험을 하고 있는 과학자)와 관찰대상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는 이런 사실을 놓치기가 쉽다. 우리가 보는 세상에서는 별개로 분리된 사물들(테이블, 의자, 사람, 행성 등)이 어쩌다가 서로 상호작용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원자 이하의 수준에서는 분리된 사물들로 구성된 세계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극미한 차원의 영역에서는 물리적 우주의 모든 사물들이 다른 사물들과 아주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 사실, 세계에는 그 어떤 '사물들'도 실제로 있지 않고 다만 에너지의 진동과 상호작용들만이 존재한다.
<의식이라는 수수께끼>
양자역학이 나타내는 수수께끼의 핵심에는 우리의 시간 개념과 공간 개념이 허위라는 사실이 있다. 우주의 나머지가 즉, 우주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우리로부터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물론 물리적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물리적 우주의 전체 시간과 크기는 그것을 발생시킨 영적 영역(의식의 영역)과 비교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더 큰 우주는 결코 '저 멀리'에 있지 않다. 사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이 문장을 쓰고 바로 여기, 그리고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거기에 있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이한 진동수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의식이라는 수수께끼>
읽는 내내 떠오르는 것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에서 다루었던 '베다-우주와 자아'였다.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틀을 갖지 않는다. 자아는 모든 것의 시작이고 중간이며 끝이다. 자아는 모든 존재의 탄생이고 시작이며, 끝이자 죽음이다. 자아는 영원하니 결코 태어난 적이 없고 결코 죽은 적이 없다. 자아는 모든 곳과 모든 사물 속에 존재하고 자기 속에 모든 만물이 존재한다. 자아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란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 그 어떤 것도 없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중에서 크리슈나가 전하는 신의 본성 자아의 신성이란...
지금의 세상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나는 베다에 대한 실질적인 경험의 사례에 대한 것을 보기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관념과 같은 것이 실제로 느껴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험'이라는 것이 전제가 된다면 조금은 관념이라는 명명 아래 아득하게 멀게 느껴지는 것들이 축지법을 쓴 듯 갑자기 내 코앞까지 다가오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나는,
나를 포함한 인간이 시한부이자 제한적인 세계에 갇힌 존재가 아니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가변적이고 불완전한 연결이 아닌 불변이자 온전하고 유일한 연결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깨달음을 원한 것이 아니라 위안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