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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Mar 24. 2021

신념이 아닌 '앎'의 문제

<사후생>

  <나는 천국을 보았다>에서 소개된 책 중에 <사후생>이라는 것이 있었다. 메모를 해 두었다가 구매해 펼쳐보니 지난날 내가 읽었던 <인생수업>이라는 책의 저자가 이 책을 썼더라. 찾아보니 2007년에 읽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죽음을 연구하는 학자였지만 그때는 그렇게 알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호스피스 닥터 정도로만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 그녀는 오랜 시간 죽어가는 사람들 곁을 지켰었나 보다. 이 책을 만난 지금의 시점에서 그녀는 이미 이생에 있지 않다. 그녀가 이야기해온 죽음 그 이후의 삶, 그녀는 이미 그곳에 있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죽음 후의 세상과 관련된 일들을 
무조건 ‘믿어야’했다. 
그러나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믿고 안 믿는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이다. 
<사후생>


  요즈음 융에 빠져있다. 단순히 심리치료사로서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일부러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읽는 책들에서 번번이 그를 만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의 생전 영상에서 이 책의 메시지와 동일한 것을 찾았다.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신을 압니다.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압니다." 그가 얘기해 왔던 '동시성'이었던 걸까? 



죽음은 당신이 계속해서 성숙할 수 있는 
더 높은 의식 상태로의 변화일 뿐이다. 
유일하게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육체다. 
육체는 더 필요하지 않다. 마치 봄이 와서
겨울 코트를 벗어버리는 것과 같다. 
당신은 그 낡은 코트를
더는 입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이것이 죽음이 가진 모든 것이다. 


  죽음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라고 한다면, 내가 최근의 책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이런 것이다. 


죽음은 이동이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이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자마자 지각의 변화가 일어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지각으로,
생각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죽은 이가 사랑한 사람, 
(단 1분이라도 먼저 죽은 사람)이 데리러 온다. 
그 누구도 홀로 죽지 않는다.
죽음과 그 이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것은 
신이, 그리고 신의 일부인 우리가 지닌 
'조건 없는 사랑'이다. 
그건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에 의해 지옥이나 천당을 가는 일은 없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그곳에 다다르게 할 뿐이다. 
삶의 시련과 고난의 역할은 인간의 성숙에 있다. 
신의 시험도 벌도 아니다.
개인마다 다른 고유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같은 것도 유사한 것도 없다. 
완전한 조화와 전체성 속에서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궁극적인 지향은 '통합으로의 귀환'이다.
떨어지는 것과
시끄러운 소음에 대한 공포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두려움은 어른들로부터 학습된 것이다. 
거꾸로 보면 대부분의 공포는 실제가 아니다.


  책의 내용 중에 천당과 지옥이 따로 없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신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과 악을 나누어 인간을 선별하지 않는다. 어떤 모습이든 인간의 모습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닐까? 그러니 인간이 살면서 신의 선택을 받기 위해 삶을 왜곡시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인간은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보기에 만족스러울 수 있는 삶을, 그리고 그 안에서 조금이나마 신성을 깨달아가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삶의 아주 구석의 것들까지 진심이었던 것에서 감동받거나 수치스러워질 것이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나 감정이 들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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