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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Jun 04. 2021

지속 가능한 평범을 그리며

<평범한 결혼생활> 중에서

  지금보다 더 젊었을 시절에 내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라고 말했다면, 그건 “지금의 삶이 힘들고 괴로워서 탈출하고 싶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일에 쫓기고 사람에 치이면서 살아가는 시간들이 내 숨통을 거머쥐고 있던 때, 나는 입버릇처럼 '평범한 삶'을 달라고 징징대곤 했다. 하지만 정작 휴식이 주어지는 날이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고 누구 하나 만날 사람이 없었다. 그저 허망하게 웅크리고 있다가 하루가 다 끝나려 할 때 왠지 모를 억울함이 울컥하고 올라오면 맛없는 음식을 배 속으로 욱여넣듯 꾸역꾸역 삼켰다. 내가 진정 원하는 '평범한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늘 욕을 먹는 것은 빌어먹을 세상이거나 나의 자유를 좀 먹는 타인들이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나는 뭐하려고 공부를 했고 이 일을 선택했으며 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인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고 앞으로는 어떻게 버텨야 하는 건지 의문만 증폭되곤 했다. '나는 틀렸다'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고쳐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이미 꼬일 대로 꼬인 내 삶의 매듭들이 두드러져 보였다. 더 이상 손 쓸 여지도 없이 뒤엉킨 채 괜찮지 않은 시간들은 멋대로 달아나 버렸다.


  그랬던 내가 지금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라고 말한다면, 그건 “지금의 일상들을 계속 누리며 살고 싶어”라는 뜻이다.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일상을 장악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저녁밥을 차려 먹고는 남편과 아들의 하루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지내는 일상을. 같은 말의 숨은 의미가 달라진 것은 내가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너무나도 평범하기 그지없어서 그리워하게 될지도 몰랐을 지금과 같은 시간들일 거란 걸 가슴으로 느끼게 되면서부터다. 평범한 나날들 속에서 한없이 평온함을 느끼면서도 혹시라도 이런 날들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어 슬퍼하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한없이 불안해한다. 고요함 속의 술렁임, 그럴수록 지금 나와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이 애틋해진다.


이대로면 좋았을 텐데...


  공부를 하고 일자리를 얻고 결혼을 하며 아이를 낳은 것에 무슨 생각이라는 것이 있을 필요 따위 없이, 알 수 없는 미래를 알 것처럼 계획하는 것보다 살아보고 알게 된 것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는 게 나을 것을 답안지 없는 시험문제를 주야장천 자신에게 들이밀고 있었구나 싶다. 어차피 삶의 의미란 지나고 나서 내가 붙이는 이름표가 아닐까. 지금의 삶을 '평범함'이라고 명명하기 위해서 나는 나름의 파란만장하고 버거운 듯한 시간을 연출하며 살아온 것이 아닐까. 시간이 흐르면 생각이 아니라 가슴이 답을 하는 것 같다.


가슴속의 애틋함,  방향이
내가 지속하고 싶은 평범함이다.


나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적당히 피하면서 사는 것도 인간이 가진 지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결혼이란 뭘까, 부부란 뭘까, 행복이란 뭘까, 같은 것들을 정색하고 헤아리려고 골몰한다거나, 100퍼센트의 진심이나 진실 따위를 지금 당장 서로에게 에누리 없이 부딪쳐서 어떤 결론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대개 실패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질문들의 종착지는 결국 ‘그럼 나는 왜 사는가’와 같은 막다른 골목일 뿐인데, 그렇다면 왔던 길을 도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패배가 아님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무엇인가의 당위나 절대성을 진지하게 사유하기 시작하면 급 피로가 몰리고 피가 머리로 쏠려 편두통이 재발할 것이다. 그럴 때는 운동화를 신고 동네로 산책을 나가 맛있는 스콘을 사 먹는 것이 현명하겠다. 적당한 때가 오면 부부가 무엇인지, 결혼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각 잡고 사색하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우리에게 어쩌다 한 번씩 알려줄 테니까. 마치 이제 알았냐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툭 치면서. 혹은 진심이나 진실은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말을 믿는다면, 그리고 진심이나 진실을 알고 싶다면, 마지막까지 따라가 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평범한 결혼생활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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