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맑았던 성격이 180도 바뀌어 자신의 초라함에 움츠러들었던 건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다. 처음으로 '우리 집이 가난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잇따른 사업실패로 부모님의 다툼이 잦아지고 딸에게 지극정성이던 엄마가 도시락도 챙겨주지 못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잃어가면서 멋졌던 아빠가 어리숙하고 무능한 사람일 수 있다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가난이 불편을 넘어 불행으로 인식이 되자 내 형편에 대한 수치심은 열등감으로 고착되어 갔다.
열등감에 일그러지는 삶의 정점을 찍은 건 대학생 때였다. 성적 장학금을 확보하고 모자라는 비용은 아르바이트로 충당하며 '성인인데 부모님께 기대면 안 되는 거 아닌가?'라고 자립적인 나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지만, 그 속에는 부모님이 대주신 등록금으로 학업에만 집중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타 대학생들과 소개팅을 하던 친구들과 달리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변변한 직업도 꿈도 없었던 남자와 소모적인 연애를 하며 '나는 조건보다 순수한 사랑을 지향해'라고 말했지만, 이 역시도 학력의 불균형으로 가정 형편의 불균형을 상쇄시키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학업과 사랑 둘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것도 진정성 있게 해내지 못하는 청춘이었다.
가난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열등감을 자립심과 순수한 사랑으로 포장하려고 한 내가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번번이 재능을, 책임감을 앞세우며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다 번아웃으로 널브러진 후에야 내가 가진 민낯과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더 어른스러운 척, 남들과는 다른 이상을 지닌 척하는 과장된 우월도 결국 열등과 같은 것이다. 시암 쌍둥이처럼 정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그래서 가난이라는 콤플렉스가 내 마음속에 싹튼 후 나의 내면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에서 한 치도 자라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