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lli Dec 30. 2021

자기소개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어디를 가든, 우리는 자기소개로 그 자리를 시작을 한다. 특히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모일 때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라도, 자기소개는 피할 수 없는 시간이다. 대학 새내기 때 그렇게 자기 소개하는 시간이 싫었는데... 여전히 자기소개는 어렵다. 나라는 사람을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사실 나도 아직 나를 모르겠는데 대체 몇 문장으로 어떻게 간단하게 자기를 소개할 수 있을까. 


구조주의 초석을 만든 천재 언어학자 소쉬르(Saussure)는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e')는 어떤 필연적 이유 없이 우연적으로 결합된다고 했다. 컵을 컵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을 뿐 '컵'이라는 기표가 '컵'의 특징을 나타내기 때문은 아니다. 각 나라에서 대상을 부르는 단어가 모두 다른 현상은 이러한 이유이다. 이름과 대상은 우연적으로 만나 '그저' 그렇게 불리고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내 이름과 나라는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남들이 나를 부를 말이 없으니까 붙여진 하나의 호칭일 뿐이다. 이름일 수도 있고, 닉네임일 수도 있고, 무어라 부르든 사실 상관은 없다. 이름이 '나'라는 개인을 정의 내리지는 않기 때문에. 다만 불렀을 때 돌아봐야 하는 사람이 한 명이어야 되니까 다른 사람과 서로 구분할 수 있도록 서로 다른 이름을 '편의상' 사용하는 것뿐이다.(여기서부터 개인의 고유성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은 어떤 인간인지 뭐라고 소개할 수 있을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된 조직, 직장, 모임, 단체를 내걸고 자신을 소개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몇 학년 몇 반 누구라고 자기소개를 한다. 아이들에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하면 어려워한다. 아마 어른들도 마찬가지 일거다. 나 역시 어디 가면 00 초등학교 0학년 아이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누구누구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거기서 나의 교사 정체성이 생기니까. 하지만 개인은 직업 뒤에 숨으려고 한다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다던 거 같은데. 교사는 나의 '업'이기는 하지만 나라는 사람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교사처럼 말하고 교사처럼 생각하고 교사처럼 행동한다는 어떤 이데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다. 직업을 걷어내고 나면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당신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그다음 주로 이야기하는 건 일종의 성격, 기질에 관한 것들이다. 외향적이에요, 계획적이에요,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따위의 것들. 성격은 한 개인이 환경에 대하여 주로 취하는 행동 지향성의 총합으로 본다. 성격은 주로 기질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하고, 성장하면서 받게 된 상처, 경험했던 개인사 등등을 중심으로 어른이 되면 어느 정도의 행동 지향성을 취하게 된다. 일종의 관습법처럼 자신이 편한 방식으로 계속하게 비슷한 문제 해결의 행동 양식을 취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경우 한 번 정해진 성격은 잘 변하지 않으며 성격이 곧 자신을 나타낸다고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성격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때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나도 술 마시는 건 싫어하지만 좋은 사람들하고 있으면 밤새 조금씩 마시면서 놀 수 있고, 처음 보는 사람하고 말도 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 때도 있다. 모든 일에 자동반사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실천하는 편이지만 그냥 즉흥적으로 양양으로 떠나는 날도 있다. 어릴 때부터 냉정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스스로 그런 줄 알고 살았는데, 가까운 지인들은 나를 마음 약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때로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과 남이 보는 자신이 다른 경우, '남들이 나를 몰라준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회심리학자인 미드(Mead)는 상징적 상호작용론에서 자아개념이 주체적 자아(I)와 목적격 자아(me)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나(I)와 타인이 기대하는 나(me)는 끊임없이 내 안에서 쟁투를 벌이면서 한 개인의 자아는 끊임없이 재구성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고정된 나(I)는 없다. (뭐 이걸 끊임없이 변절하는 인간, 이런 것 따위로 보면 곤란하다. 변절과 성장은 다르다.) 그래서 타인이 나를 보아주는 성격 역시 내 자아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나 역시 스스로를 따뜻한 사람이라고 딱히 생각하고 산 적이 없었는데, 남들이 그렇게 말해주니 이제는 그런 사람인가 보다, 혹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니 하나도 능글맞지 않은데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적당히 능글맞은 소리도 하게 된다. 더 어렸을 때는 괜찮다는 소리만 하면서 이 악물고 버텼다면, 지금은 징징거리기도 하고 안 괜찮다고 하면서 적당히 놓을 줄도 알게 되었다. 곁에 머물러준 사람들 덕분이다. 


이렇게 소속도, 성격도, 자아도 고정된 개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나를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까. 다만 강제로 어른이 되어 조금 살아가다 보니 내가 추구하는 삶의 지향점들은 조금 생기기는 했다. 지금 나에게 있어 최대의 과제는 균형감각을 찾는 일이다. 직업에서도,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도, 내 성격에 있어서도 매사 극단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균형을 추구하면서 원칙을 찾는 일이 삶에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뭐, 이런 사람 정도로 너에게 나를 소개할 수 있을까. 


한 선생님의 수업을 계속해서 참여관찰했던 기회가 있었는데, 그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요즘 아이들이 자기 것이 없잖아요. 뭐... 휴대폰, 신발 이런 건 자기 것이 아니고, 그런데 글은 아니더라고요. 글은 온전히 자기 것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글쓰기 수업을 계속하는 것 같아요." (난 이 선생님처럼 살고 싶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계속해서 세상을 짓는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글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라고 했는데 친한 동생이 "누나는 글이랑 실제랑 너무 달라요."라고 했었다. (글에 대한 칭찬이었는데 그럼 실제로는 어떻다는 거지... 욕인가 칭찬인가...) 


누군가가 쓴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 누군가가 만들어낸 세상이 바로 글이니까. 그래서 그 무엇도 아닌, 활자로, 내가 지어낸 세상으로, 자기소개를 해보려 한다. 

당신에게.  


매거진의 이전글 보통날에 대한 기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