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간절함에 대하여
우리 사이를 인정하지 않는 건 너잖아
진홍빛 우산 아래서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아니 절규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관계를 망치는 건 늘 나였다.
라고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그는 빗속에서 계속 말했다. 아니 절규했다.
한 계절 잘 머물다 가자고 네가 그랬잖아. 그러니까 그냥 가보자고. 나는 안 아픈 줄 아냐고. 나는 감정도 없냐고. 나도 항상 각오하고 말한다고. 왜 자기 혼자만 아픈 척, 힘든 척하냐고. 나는 안 힘든 줄 아냐고.
주룩주룩 내리던 빗소리보다 우산 속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했다. 그는 참아왔던 눈물을 기어이 뱉어내고야 말았다.
뭐가 달라지냐고, 그렇게 생각하면 뭐가 달라지냐고 그녀에게 다그쳤지만 여자는 벌건 그의 두 눈만을 응시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남자는 종종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가려두었던 여자의 본심을 심드렁한 말투로 아무렇지 않게 벗겨내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어, 네 말이 맞아.라고 생각했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지금 이 순간에는.
한참을 슬픔을 뱉어내다 그들은 다시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홍빛 우산 아래 남자는 흐느꼈고 여자는 숨죽였다.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함께 울어내지 못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삼켜야 했다. 그래도 남자는 여자의 손을 끝까지 꼭 붙잡고 있었다.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내가 다 망쳤어
라고 그녀는 집에서 말했고 남자는 뭐가 라고 두 번이나 물었다.
여자는 '우리 관계'를 다 망쳤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진짜로 망친 게 될 거 같아 그냥 모르겠다고만 대답했다. 남자는 여자가 또 대답을 회피한다고 생각했지만 포기한 듯 이내 더 묻지 않았다.
여자는 늘 두려웠다. 엄청난 나이 차이 때문이라서, 수군거림의 대상이 될 만한 관계라서,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그게 본질은 아니었다. 여자는 누구를 만나든 어느 자리에 있든 상대방이 자신을 떠날까 봐, 버림받을까 봐 늘 두려웠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했고, 때로는 자기가 먼저 버리기 위해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이유와 변명을 붙여가며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 취하려고 했다. 설렘, 기쁨, 행복은 취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 남자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라고 뒤늦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남자가 자기를 떠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나는 너를 떠날 수 있지만, 너는 나를 떠날 수 없어.
여자는 남자의 말대로 이기적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을 끝까지 지켜내는 건 여자가 아니었다. 나중에 아플까봐 미리 방어막을 치는 건 여자였지만, 그래서 결국 다치는 것도 여자였다. 진짜 사랑에 충실한 사람인,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인 남자가, 결국을 자기 스스로도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사회의 시선, 두려움, 지위, 모든 것을 잃을까 두려워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빈 껍데기들이었다. 공허함만이 남은 자리, 지키려고 했던 모든 것은 쓸쓸했고 반드시 지켜야 했던 남자는 지키지 않고 있었다. 남자의 말대로 여자는 이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의심하던 태도가 결국 남자에게도 가 닿았겠지, 그리고 그를 아프게 만들었겠지.
어리석구나.
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내던지겠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여전히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그저 상대방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주체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아직도 누에고치 속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건 남자였다. ‘가보자고, 그냥 가보자고’라고 붉어진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하던 남자만이 자기 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여자는 밤새 벌게진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던 남자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 간절함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