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lli Dec 30. 2021

바쁨의 미학

이란게 있을까.


언제나 항상 바빴지만 최근 2주간은 그 바쁨과 할 일이 나의 수용가능성을 넘어가는 것을 느낀다. 12월 2주차까지는 수업과 평가를 정리하느라 학급 활동이 바빴다고 한다면, 지난 주부터는 교육과정 평가회, 생기부 정리, 졸업식 준비가 있었겠지만 더불어 지난 주 월요일과 목요일까지 대학원 과제 3개를 제출해야했고, 과제를 제출하기 직전 토요일에는 속초까지 출장을, 중간에 친구들을 만나는 약속까지 있었으니 사실 누군가를 탓할 수는 없다. 이 바쁜 와중에도 굳이굳이 그대들을 만나고 싶은 나의 과욕이 불러온 참사 정도로 규정할 수 있을까.


신기하게도 이렇게 바쁠 때 굳이 속초까지 갔던 출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누가 들으면 미친놈이라고 하겠지만, 때로는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나의 논문 주제를 향해 모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그날도 그랬다. 그날 출장 이후 나 포함 4명의 선생님이 남았는데 ‘교육과정’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4시간이 넘게 떠들었다(이것도 누가 들으면 미친놈들이라고 할거다). 세상에 만상에 참교사들 납셨네라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그 세 분은 처음 본 사람 1명, 두번 째 본 사람 1명, 세 번째 본 사람 1명이었다. 그 분들에게도 내가 뭔가 어색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인간이었을텐데 그 4시간의 회동이 끝난 후 우리는 호텔이름을 따 ‘마000 결의’를 만들었고, 1월에 1박 2일 워크숍을 동해에서 갖기로 약속했다. 이 알 수 없는 동지애는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분들과 함께 연구회를 조직하고 공부하고자 했던 내용이 결국에는 나의 논문 주제와 맞닿아있는 부분이라 취소할 수도 있었던 그날의 나의 속초행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풀리지 않는 고민을 계속 싸안고 있다가 뜻하지 않은 자리, 생각지 못한 사람을 만나는 순간 이런 고민이 해결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바빠도 출장이나 모임, 그런 자리를 가급적 가려고한다. 내가 해야할 일들은 어떻게든 허덕허덕 거리면서 끝낼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국 지난 주에 과제 3개는 어떻게든 제출했고, 지도교수님 과제낸 게 맘에 안들고 거지같긴 하지만 논문 관련해서 SOS를 요청하는 아주아주 긴 메일을 보내두었기 때문에 지도제자를 어여삐 여기신다면 학점을 막 주시지는 않을 거다(라고 믿고 싶다). 그와중에 동무들과 거센 크리스마스 파티도 즐겼으며 주말에 어떻게든 나이스 대부분을 해치웠다(물론 누가기록과 시간표 정리는 빼고). 어제도 수업도 다하고, 다른 학교에 갔다가 졸업식 준비 때문에 여기 저기 전화했다가 퇴근하고 넉다운 되서 또 씻지도 않고 자다 새벽 1시에 일어나서 씻고, 오늘 겨우 출근해서 수업하고, 2시부터 회의하고 졸업앨범 받고 생기부 갖다 드리고, 내일 교학공 때 발표할 자료 만들고, 졸업식 물품 확인하고 상장용지 사러 갔다와서 상장 만들고 집에 와서 생기부 검토하고 그러다보니 10시가 넘었다. 아직 다른 반 생기부는 다 보지도 못했고, 목요일 공부모임에 가져갈 자료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건 결국 내일로 미뤄지는 건가 싶다. 어이쿠, 그러고보니 내일도 저녁 약속이 있네.


바쁨에서 미학을 찾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업무를 하나씩 처리할 때마다 스케쥴 앱에서 체크체크 하는 쾌감? 이 쾌감 때문에 바쁨을 자처하기란 그 감정의 크기가 너무 작다. 어쩌면 해야하는 일을 미뤄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서 오는 일탈, 지금 내가 바빠 죽겠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바빠 죽겠다는 상황이 주어질 때만 경험할 수 있는 딴짓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아, 앞서 말했던 뜻하지 않게 만난 깨우침의 순간도-! 이런 순간은 내가 시간이 없어 아무것도 못한다는 상황을 전제해야 가능하다. 그러니 (조금 변태같긴 하지만) 딴짓의 미학적 순간을 위해, 일탈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우리 이 바쁨의 나날을 기꺼이 기꺼워 해볼까.


(부제: 미친 사람은 아닙니다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자기소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