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마추픽추를 안 가겠다고??

by someday

처음부터 마추픽추를 가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남미 여행을 계획하면서 꼭 가야겠다 마음먹은 것은 오로지 우유니뿐이었지만 첫 도시 첫 관광지인 마추픽추가 궁금해서 가려고 했었다.


쿠스코는 생각보다 너무 추웠고 고산병은 두통으로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유명하다는 파비앙 여행사를 찾아가 마추픽추 1박 2일 투어를 예약했다. 심지어 특가 세일에 넘어가는 호갱처럼 평소엔 없는데 오늘만 자리가 있다는 와이나 픽추까지 예약해버렸다. (와이나 픽추는 마추픽추 옆 봉우리인데 올라가려면 한 시간 동안 급경사를 트래킹 해야 하지만 올라가서 마추픽추를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한다. 고생길이 훤했다.) 30만 원 씩이나 하는 투어 요금도 기꺼이 냈다.


다음날 아침 7시 정각, 파비앙 사무실로 갔더니 파비앙은 죽을상을 하고 앉아있었다. 마추픽추로 올라가려면 2가지 정도의 길뿐인데 그 동네 마을 사람들이 파업을 해서 관광객들이 지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미에선 흔하다는 그 파업을 오자마자 목격하게 된 것! 다행히 '마추픽추까지 가는 길에 하게 되어 있는 몇 가지 관광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면 갈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하기에 우르르 따라나섰다.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달렸을까. 마을 사람들이 버스 앞을 막아서고 모두 내리게 했다. 우리는 버스에서 쫓겨나 길바닥에서 대기해야 했다. 일교차가 큰 쿠스코의 낮은 너무나 뜨거웠고 그 뜨거운 땡볕에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점점 화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타고 온 버스마저 다른 사람들을 태우고 떠나버리는 등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IMG_4426.jpg 버스에서 쫒겨나 길바닥에서 대기 중


사실 나는 화가 나진 않았다. 마추픽추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도 아니고 다음 일정이 정해져 있지도 않았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화가 나기 보단 나랑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 정도였다.


스크린샷 2018-03-11 오후 12.20.06.png 아르마스 광장에서의 시위

시내로 돌아와 보니 아르마스 광장에서도 시위를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식수 공급과 임금 인상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파업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파업 후 3일이 지나면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어서 마추픽추에 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2가지. 80% 환불을 받거나 3일 후 파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서 마추픽추에 가는 것이었다. 나는 정해진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기다리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쿠스코를 마지막 일정으로 온 몇몇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환불을 받고 쿠스코를 떠나야 했다.


제목에서 모두 예상했겠지만 나는 결국 80% 환불을 받고 볼리비아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파비앙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갈 수 있는데 안 가다니 왜 그러냐며 진짜로 환불을 바라냐고 몇 번을 물어봤다. 나는 그저 이 험난한 과정 자체가 마추픽추는 나와 인연이 아닌 것이라고 받아들였고 춥고 비 오고 머리 아픈 쿠스코를 이제 그냥 떠나고 싶었다. 심지어 공돈이 생긴 기분이라 좋았다. 하하


그렇게 나는 마추픽추에 가지 않았다.


만약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지 못했다면 무척 아쉽고 속상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가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이기 아쉬움 보다도 무언의 뿌듯함, 무언의 통쾌함이 있었다. 모두가 YES라고 할 때 혼자 NO라고 하는 기분이었달까. 내 인생에서 몇 번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그래 이러려고 내가 혼자 여행을 온 거였지


평소 점심 메뉴 하나 잘 못 고르는 나는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사람이었다. 나의 취향에 대해 무지하다고 해야 할까. 나이가 드니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고, 이 영화도 재미있고 저 영화도 재미있는 그런 사람이라서 내 취향보다는 주변 취향에 맞추어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사람이었다.


나이를 좀 더 먹고 혼자 여행을 오니 이제는 나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배짱도 있고 여유도 있는 30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경의 마추픽추는 만나지 못했지만 이 경험으로 인해 나는 내 선택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마음껏 게으른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마추픽추에 가지 않음으로써 마추픽추 인증샷 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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