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마음이 열리는 순간

by someday

쿠스코는 안데스 산맥 해발 3,400m에 위치해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가장 높은 지대는 한 800m쯤 되는 도봉산 정상, 그리고 몇 년 전 부모님과 함께 다녀온 2천미터 쯤 되는 백두산 정도였다. 사실 3,400m라고 해봐야 얼마나 높은 건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고산병을 조심하라고 했지만 평소 튼튼한 나는 나는 아니겠지 하며 자만했다. 쿠스코에서 머리가 아프고 숨이 찰 때도 이 정도는 그렇게 심한 게 아니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냥 누가 봐도 100% 고산병이었다. 그냥 나는 고산병 때문에 힘들어서 쿠스코가 힘들었던 것이 맞았다. 어찌 보면 엄청난 선택이 아니라 그냥 머리가 아파서 마추픽추를 안 가고 코파카바나로 후다닥 넘어온 것이었다.


한낮에 도착한 코파카바나엔 따뜻한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대학생 친구들은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겠다 했고 나는 저기 더 위에 있는 '라쿠풀라'라는 예쁘고 비싼 숙소에 묵겠다 했다. (나는 직장인이니까!?) 예약을 못해서 방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혼자 배낭을 메고 씩씩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10분쯤 걸었을까.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때부터였다. 날씨도 따뜻하고 호수도 보여서 분명 쿠스코보다 낮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지, 숨이 찬다.. 몇 걸음 안 걸어도 숨이 찬다. 무거운 가방 때문이겠거니 생각해도 머리도 아프다. 아직 쿠스코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 생각하며 가파른 언덕을 10여분을 올라 '라쿠풀라'에 도착했지만 역시나 방이 없었고 정말 너무 힘들고 울 것 같은 심정으로 다시 대학생 친구들이 가겠다고 했던 게스트하우스로 내려갔다.


코파카바나는 호수가 있으니 낮은 곳인 줄 알았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란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도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호수니까 쿠스코보다는 낮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똑똑이 대학생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코파카바나는 무려 3,800m!!!로 쿠스코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우린 지금 체감 해발 4천 미터쯤인 거라고 몰랐냐며,, 하하 아니 호수가 왜 이렇게 높은데 있는 거죠? 이 높은 데서 갑자기 10kg 가방을 메고 급경사를 오르락내리락했으니 힘들 수밖에..


결국 완전히 지쳐서 게스트하우스에 함께 방을 잡았다. 마지막 직장인 부심으로 100 볼을 내고 2인 룸을 잡았다. 엄청 허세 부린 느낌이지만 사실 100 볼은 15,000원 후후. 방에서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을 쉬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배도 슬슬 고프고 해도 지고 있기에 일행들과 함께 어슬렁어슬렁 호숫가로 나가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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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같았다. 현실성 없는 풍경이었다고 해야 할까. 내가 남미에 온 것이 맞는 걸까. 여기는 4천 미터가 맞는 걸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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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들 , 떠돌이 개들, 낡은 오리배들이 널브러져 있는 지저분한 선착장이었고 어떻게 보면 그 어느 곳보다 감동적인 고요한 호숫가였다. 모든 풍경은 사람마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남미에 도착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기에 혼자 있었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며칠 만에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웃고 떠들고 있으니 즐거웠다. 아픈 머리는 언제 아팠냐는 듯 멀쩡했고 포장마차 같은 가게엔 입맛에 딱 맞는 트루차(송어) 튀김, 볶음 등의 요리와 시원한 맥주가 있었다. 나이도 성별도 각각 다른 사람들이 모여 앉아 각자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며 마음을 열어 놓기 시작하는 그 순간이었다.


여행에서 만나는 마음이 열리는 그 순간들은 언제 마주해도 설레고 따뜻하다. 혼자 오랫동안 여행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 순간에 중독된 것이리라. 이런 순간들을 위해 힘들고 외로운 여행길을 견뎌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어느새 밤이 왔고 마을에선 축제를 하는지 흥겨운 음악이 계속해서 울려대고 있었고 우리는 취기가 올라 마을 축제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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