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주말이면 정오가 넘어서까지 늦잠을 잔다. 몇 년 전 보다 눈 뜨는 시간이 좀 빨라지긴 했어도 그래 봐야 12시다. 여행에 가서도 아침 일찍 서두르는 편은 아니다. (조식은 먹고 다시 잔다. 눈뜨면 배고픈 나란 사람) 유럽 여행을 할 때도 시차도 못 느끼고 잘 잤다. 그래서 남미도 괜찮을 줄 알았다. 잘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남미에 온 지 한 6일째 되었는데 계속 아침 7시에 눈이 떠졌다. 완전히 지구 반대편에서는 나도 시차에 적응이 안 되는 걸까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걸까 (먼산)
코파카바나에 도착한 다음 날도 아침 7시에 눈이 떠졌다. 태양의 섬에 들어가 보기로 한 날이었다. 들어가서 하룻밤 자보고 좋으면 하룻밤 더 자야지 생각했다. 내가 세운 여행 계획은 '페루 쿠스코로 들어와서 볼리비아를 거쳐 우유니를 보고 칠레를 거쳐 아르헨티나에 가야지'정도 뿐이었다. 도시들에 대해 그리고 이동하는 방법들에 대해선 최대한 많이 알아봤지만 첫날 숙소 외엔 아무것도 예약하지 않았다. 예전 유럽 배낭여행을 할 때에도 그랬었다. 그게 내가 원하는 곳에 원하는 만큼 있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미는 유럽보다 더 장기 배낭여행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도 예약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남미에선 버스가 출발하지 않거나 기차 시간이 바뀌거나 예상할 수 없는 일들 천지라서 예약을 한다는 것이 더 어려웠다. 하지만 예약은 안했어도 마음 속에 정해둔 일정대로 움직이고 싶은 사람과 일정이 어떻게 되든 별로 신경 안 쓰는 사람,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나는 후자였고 워낙 선택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흘러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게 좋았다.
결국 게으른 이 여행의 원인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라는 다짐보다 아직도 내가 하고 싶은 걸 잘 모르는 바보 어른의, 선택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우린 태양의 섬에 가기로 했다. 태양의 섬에 가는 배가 있었으니 가보기로 했다. 게으름을 피우며 밥을 먹고 1시 반에 출발하는 작은 배에 올라탔다. 하지만 역시 남미! 2시가 넘어서야 출발! 배는 느릿느릿 두 시간쯤 호수 위를 미끄러져 달린 후 태양의 섬에 도착했다.
태양의 섬에 도착! 높이 올라갈수록 경치 좋은 숙소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우린 모두 10kg 이상의 배낭을 메고 있었고 예약을 하지도 않았고 숙소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다행히 경치 좋은 위쪽 숙소를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도 없었다. 선착장에 나와 호객행위를 하고 있던 인상 좋은 아저씨를 따라나섰다. 가까운 숙소라고 해도 언덕에 계단에.. 으아 4천 미터에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등산을 하려니 진짜 죽을 맛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서 다른 숙소를 가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호객행위가 잘 될 것 같은 섬이었다.
역시나 우린 4명이었지만 3인실을 받아서 어떻게든 쓰겠다고 결정했다. 뭐 뜨거운 물도 나오고 침대도 눅눅하지 않고 이 정도면 천국이다. 짐을 풀어놓고 호숫가로 나가보았다. 태양의 섬은 코파카바나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파란 하늘, 하얀 뭉게구름, 하늘보다 더 파란 바다 같은 호수.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 보정 없이도 선명한 색감.
호수에서 수영을 해보고 싶다던 패기 좋은 대학생 친구들은 진짜로 호수에 뛰어들었다. 존경스러운 젊은이들의 패기.. 고산지대에서의 수영은 생각보다 힘든지 얼마 못 버티고 다들 금세 나왔다. 그래도 들어갔다 나온 것만으로도 사진 찍는 것만으로도 모두들 왁자지껄 너무나도 즐겁고 신이 났다.
배가 고파 지자 섬 위쪽에 위치한 식당을 찾아 나섰다. 배낭을 내려놓으니 몸이 훨씬 가벼웠지만 그래도 4천 미터+언덕의 콤보는 쉽지 않았다. 평지라면 15분쯤 걸릴 거리를 4~50분 만에 식당에 도착, 천천히 나오는 음식을 고통스럽게 기다리다가 순식간에 해치우고 나니 밖은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조심조심 또 한 시간여를 내려가 숙소에 도착해서 이런저런 여행에 대한,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인터넷도 안되고 식당도 몇 개 없고 가로등도 없는 조용한 섬, 일행들과 함께 있으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심심한 줄도 몰랐다. 잠자리에 누워 가만히 생각해본다. 혼자 고요한 하룻밤을 보냈다면 어땠을까. 어둠을 헤치고 섬 위에 가서 밥이라도 먹을 수 있었을까. 그래도 혼자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을까. 함께인 지금은 고요함이 그립지만 혼자였다면 외로웠으리라. 게으름을 부릴 수 없게 하는 일행들이지만 그래도 일행들 덕분에 따뜻한 하룻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