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독일 만하임에서 아침 열차를 타고 오후 2시께 도착한 그린델발트. 스위스도, 그린델발트도 이번이 2번째였다.
그린델발트역에 도착한 모든 여행자들은 탄성을 하나같이 내지른다. '어디 가면 더 높은 산들이 많다, 알프스산들은 3000미터 내외에 불과하다'는 세인들의 말은 쉬렉호른-베터호른-아이거-묀히의 웅장한 자태 앞에서는 헛소리로 들릴 뿐이다. 이미 2019년에 방문했었음에도, 그때와 똑같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Jungfraubahen Pass 중에서 가장 만만한 21코스를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목표는 Grosse Schedegg까지였다. 몇개월동안 기획했던 융프라우 트래킹의 첫 발을 내딛는다는 마음에 너무 설레여서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1km를 오르자, 그린델발트 중심지를 벗어나고, 1km를 더 오르자 관광지나 호텔들이 점점 사라지고, 다시 1km를 오르자 피르스트에서 내려오는 트로티바이크들을 만나고, 2km를 더 오르자 나같은 트래커들 사이에서 유명한 '호텔 베터호른'에 이르렀다.
호텔 베터호른에서 1Km 위쪽부터는 눈때문에 더 이상 나아가기 힘들어서 이 날은 그냥 내려왔다. 곧 5월인데도 산 중턱에는 눈이 꽤 많이 남아 있어서 살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괜찮을까? 괜찮겠지를 반복하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손님 중에서 1번째로 조식을 먹고, 그린델발트 투숙객에 주는 무료 버스 패스를 이용하여 Grund 역까지 왔다. Jungfraubahnen Pass의 백미라고 불리우는 33번(멘리헨 to 클라이네 샤이덱) 코스를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케이블카는 문이 닫혀 있었다. 여기는 아직 겨울이라 5월말부터 운영한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걸어서 올라가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아래 파란색 화살표가 원래 가려던 계획이었는데, 보라색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지금도 제주 올레길 2개 코스, 40km 정도는 아무 생각없이 걷곤 하지만, 이 당시는 컨디션이 최고조인 상태여서 40km 정도의 초-중급 하이킹 코스는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Jungfraubahnen Pass의 상급 코스: 5, 18, 36, 42 ㄷㄷㄷ)
34번에서 32번 코스로 방향을 꺾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만난 전나무 숲. 춥고 힘들었지만 전나무 숲 가운데에서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전나무 숲을 벗어나자 길에 덮인 눈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Grindelwald Grund역에서 출발한 케이블카가 멘리헨 역에 도착하기 전, 한번 거치는 Holenstein역은 케이블카가 시범운영중이었다. 이 역까지는 그나마 아직 길이라는 게 있었는데, 이 역을 지나면서부터는 길 자체가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가끔 차가 지나다닌 흔적이 나타나기도 해서 그걸 믿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 그 조차도 없어져서 눈 밭에 조난당하고 말았다...
언제 내가 방심했는 지, 아직도 아리송하다. 분명 바퀴 자국을 잘 따라 걷다가 갑자기 놀이터 같은 게 나오길래 그리로 갔는데 이 시점부터 발목까지 쌓인 눈이 종아리, 무릅까지 차 오르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 100미터를 움직이는 데 1시간 30분 가까이 시간을 보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주변은 오직 전나무 숲 뿐이었다. 눈밭에서 낑낑 대서인지, 잔뜩 긴장을 해서인지 몸은 땀으로 젖었는데, 그게 다시 식어버리니까 추위가 엄습했다. 그러다가 정말 다행히도 길처럼 보이는 회색 선을 발견하고, 안간힘을 다해 그리로 걸어갔다? 걸어간 걸까?
모든 길 중에서 눈 길이 가장 최악이다. 모래밭도 힘들고, 산의 돌길이나 바닷가 바위길, 제주도 현무암 길도 힘들긴 하지만, 무릅까지 차오른 눈 길은 그야말로 한발짝도 나아가기 힘들다. 게다가 길 자체가 보이지 않아서 갑자기 밑으로 쑥 빠져버리거나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 쉽상이다.
겨우 눈 밭에서 빠져나와 앞쪽을 바라봤다. 분명 저기 저 능선 끝자락에 멘리헨 역이 보이는데, 눈밭에서 1시간 30여분동안 사투아닌 사투를 벌이고나니 다시 눈길을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3시. 왔던 길은 아니지만, 차길을 따라서 내려가기로 했다.
차길 따라서 내려가는 길에 벤치가 있길래, 잠깐 쉬면서 남은 샌드위치를 먹었다.
멀리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하얀색은 경기를 불러일으키는 반면, 초록색은 보기만 해도 반가웠다. 다행히 멀리 그린델발트 시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구글 지도로 검색해보니 주변 마을에 그린델발트로 가는 버스가 있기에 거기 정류장에 앉아서 하루 5대 다니는 버스를 기다렸다.
다음날은 피르스트로 오르는 코스, 15번과 피르스트 주변의 4번, 9번 코스를 가기로 했다. 눈 때문에 어떻게 계획이 뒤틀어질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