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 여행

Swiss 그린델발트 트래킹 (2)

피르스트

by 조성봉 UXer

나는 업힐(up hill)을 겁내지 않는다. 그런 줄 알았다.

IMG_4493.JPG 이 길을 오르기 전까진 말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그린델발트에 오는 이유는 1) 융프라우 올라가기 위해서, 2) 피르스트에서의 액티비티 때문일 것이다. 2019년 스위스 여행시 우리도 그 2가지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린델발트를 찾은 것은 트래킹 100%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융프라우는 패스, 피르스트는 1차 목적지였다. 멘리헨과 달리, 피르스트는 4월말임에도 케이블카가 운행중이었다. 물론 나는 케이블카는 생각조차 안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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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도착하자마자 갔다던 21번 코스를 타고 Upper 그린델발트로 올라가다보면 피르스트에서 트롤리바이크가 내려오는 지점이 나타난다. 거기서 트래킹을 시작했다. 아직 서늘한 공기와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 햇살을 만끽하며 마을을 한참 올랐다. 1차 목표는 Bort 역까지 였다. 그린델발트에서 피르스트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는 2번 경유하는데 그 첫번째가 Bort역이다. 까짓 거. 이 정도가 대수랴. 나는 업힐을 겁내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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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르고, 오르고, 오르다 보니 아침의 활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과 깊은 침묵만이 멋진 풍경 위에 남아 있었다. 오르고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의 하이킹이 미치겠는 게 (빽빽한 나무로 시야가 좁은 우리나라와 달리) 올라가야 할 길이 훤히 보인다. 처음에는 저 정도쯤이야 하고 무시하다가, 한참 올랐음에도 그 길의 중간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눈 앞에 보이는 길은 공포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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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30분 가량을 올라온 끝에 드디어 Bort역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케이블카? 무조건 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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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사람 한명 못보다가 이날 처음 사람(역무원)들을 만났다. 그런데 왜 나와 역무원 2명 외에는 아무도 없나? 의아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린델바트에서 아직 첫 차가 출발 전이었다. 그린델발트나 Bort역 둘 다 아침 8시에 첫 차를 운행한다. 관광객 거의 다가 그린델발트에서 8시에 출발할 때, 나도 Bort역에서 8시에 출발했다. 피르스트 역으로..


문명의 이기는 아주 훌륭했다. 엉덩이를 붙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지만, 눈덮인 산들과 케이블카 탑들의 이국적인 경치는 눈을 즐겁게 했다. 연신 사방을 둘러보면서 20여분을 가다보니 (쉬렉펠트역을 거쳐) 피르스트 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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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나 혼자 도착했다는 것. 그린델발트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이제 겨우 Bort역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혼자서 피르스트 주변을 빙 둘러보는데, 피르스트역을 기점으로 출발하는 상위 코스들은 눈 때문에 모두 막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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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혼자서 피르스트 클리프 워크(First Cliff Walk by Tissot)를 걸었던 것. 피르스트 클리프 워크(First Cliff Walk by Tissot)는 Tissot라는 시계 회사가 후원해서 만든 곳인데, 원래라면 사람이 바글 바글했겠지만, 그 시점에는 나 혼자 밖에 없었다.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혹시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까지 들었으나, 얼마 않있자 관광객들이 우루루 올라와서 연신 사진을 찍고 각종 액티비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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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때문에 위쪽으로는 전혀 갈 수 없었고, 비교적 가까웠던 바흐제조차도 가지 못한게 못내 서운했지만... 30여분동안 피르스트를 나 홀로 즐길 수 있었다는 게 워낙 특별한 경험이어서 그런지, 가벼운 마음으로 15번 코스를 따라 하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하산이 생각보다 힘들긴 했지만, 그린델발트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경치들을 중간중간에 계속 볼 수 있어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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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치라니.. 문득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비록 이미 3만보를 넘게 걸었고, 그 중 1만보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온터라 허벅지가 후들거렸지만,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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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르스트에서 그린델발트로 내려오는 길


내려오면서 '미쳤다'를 대여섯번 반복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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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간 벤치에다가 폰을 놓고 내려와서 다시 여기까지 500여미터를 올라왔었다;;


위 오른쪽 사진이 오늘의 점심 장소. 내 영혼의 음식인 블루베리. 아쉽게도 이 날은 그릭 요거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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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물가가 비싸다는 말이 많지만, 대부분의 식료품들은 독일 만하임에서 사 왔고, 술은 거의 마시지 않으며, 과일들은 Coop에서도 그다지 비싸지 않아서 나는 '그 비싸다는' 물가를 거의 체감하지 못했다. (물가는 여행 막바지에 루체른, 루가노, 로체르노에 가서 체감한다)


그린델발트에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찍힌 도보수는 40000보 정도였다. 2시간 가까이 계속 다운힐(Down Hill)만 하니까 허벅지, 무릎, 종아리, 발목.. 안아픈 곳이 없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IMG_4634.JPG 슈터호른-묀히-융프라우의 절경 때문에 그 사진이 그 사진 같아 보인다.


그 다음날은 그린델발트의 옆 동네인 뮈렌과 벵겐, 라우터부르넨을 간다. 아이들과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곳이다. 이미 산 중턱부터는 눈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트래킹에 대한 욕심은 어느 정도 접어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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