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etscherschlucht 트래킹
5월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5/2)에는 바젤을 거쳐 루체른으로 갈 예정이라서 이 날이 그린델발트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지난 4일간의 그린델발트 트래킹을 돌이켜보면 의외로 좋았던 경험도 있었지만, 쌓인 눈 때문에 자꾸 길이 끊겨서 실망도 적지 않았다.
전날 뮈렌/벵겐 트래킹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서 마지막 날은 어딜 갈지 AllTrails와 Komoot(유명한 트래킹 사이트들)를 계속 찾아본 끝에... gletscherschlucht 트래킹으로 정했다.
Gletscherschlucht는 독일어로 빙하 협곡이라는 뜻으로 그린델발트의 Gletscherschlucht는 아이거와 메텐베르크 사이의 300미터 수직 암벽과 협곡 사이의 뤼치네(Lütschine)강으로 이뤄져 있다. 다행히 5월 1일인 이 날부터 코스가 오픈되었는데.... 나는 이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나는 어설픈 J다;;)
동이 트자마자 호텔 조식을 먹고 길을 나섰다. 그린델발트 버스 터미널에서 Grund역 쪽으로 20여분 내려온 다음, 슈바르체 뤼치네(Schwarze Lütschine)강을 건넜다. 저 멀리 둘째날 오르려고 노력했던... 멘리헨이 보인다.
슈바르체 뤼치네(Schwarze Lütschine)강은 Gletscherschlucht에서 발원하여 인터라켄까지 흘러가는 얕은 하천으로 빙하가 녹은 데다가 화강암 가루가 섞여서 강물이 까맣다(Schwarze). 이 강을 따라서 Gletscherschlucht까지 가는 산책로는 풍경이 무척 빼어나다. 100% 평지이므로 체력이 자신이 없거나 트래킹에 관심없으신 분이더라도 이 산책로는 가보시기를 권한다.
Gasthaus Gletscherschlucht에 다다렀다. (Gasthaus Gletscherschlucht는 숙소라기 보다는 Gletscherschlucht에서의 여러가지 액티비티를 시작하는 매표소? 전진기지?에 가깝다) 여기서부터 협곡 사이 구름다리까지는 오르막 길이다. 불과 30여분의 길이나, 경사가 다소 가파라서 얼마 오르지 않았음에도 금방 숨이 차오른다.
이날따라 날씨도 온화해서 오르는 동안 땀이 많이 났다. 협곡 구경이나 하자는 마음에 선택한 코스이지만, 밑에서만 봐왔던 협곡을 위에서 보면 어떨지 이때까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이날이 그린델발트에서의 마지막 트래킹이라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40%? 50%는 이뤘을까? 역시 가장 아쉬운 것은 멘리헨 32번 코스이다.
그렇게 아쉬움을 곱씹으면서 계속 오르다보니 갑자기 오르막이 그치고 난간이 보였다. 피부를 엄습하는 서늘함에 청량감을 느끼면서 난간으로 다가갔다.
세상에.. 거기에는 말도 안되는 깊이의 협곡(300미터 수직 암벽)이 까마득하게 밑으로 펼쳐졌다. 평범한 산행이 갑자기 전혀 평범하지 않은 경험으로 바뀌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런 거대한 협곡의 위에 선 것은... 위 아래로 가대한 절벽이 마주 서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답답함보다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늘 보던 자연이 아닌, 자연이었다.
거대한 산(아이거, 베터호른) 사이에 난 수직 협곡은 자연이 만들어 낸 천연 선풍기이기도 했다. 협곡 안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땀이 금새 식어 버렸다.
협곡 사이에 난 좁은 다리. 그냥 평범한 다리처럼 보이지만 막상 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하다. 아래 있는 동영상에 그 아찔함을 담았다.
협곡 사이를 집라인처럼 가로지르는 캐년 스윙(Canyon Swing)이나 스파이더웹(Spiderweb)이라는 그물망도 있는데, 아직 미운영중이었다.
좋았다. 피르스트를 혼자 다닌 것도 좋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Gletscherschlucht의 웅장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경이로웠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리를 건너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다리의 폭이 좁고, 위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거세서 그마저도 살짝 흔들렸기 때문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동시에 너무 상쾌했다. 거대한 두 산 사이, 매우 좁은 협곡 중간에서 깍아지른듯한 절벽들을 내려다/올려다보고 있자니 평생 처음 느껴보는 청량감이 들었다.
다리에서 연신 셀카를 찍다가 너무 추워서(바람이 쎄다, 그리고 차갑다) 반대 방향인 베터호른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협곡 자체는 아이거와 메텐베르크 산 사이에 있지만, 반대편 내려가는 길은 베터호른으로 이어진다. 뒷산인 메텐베르크와 앞산인 베터호른이 어찌저찌 이어진 모양이었다. 베터호른은 그린델발트에서 바로 보이는 산이다. 베터호른을 (더 유명한) 아이거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디 근사한 벤치를 찾아서 샌드위치나 먹어야지 하고 털레털레 내려오고 있는데, 어라 이건 또 뭐지?
미쳤다. 그건 그냥 경치가 아니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이 있고', 양때나 염소떼, 소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또한 시끌벅적한 그린델발트 시내나 피르스트와는 다른, 평화로운 고요함이 있었다. 왜 사람들이 여길 모르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Gletscherschlucht 건너편의 베터호른-Upper 그린델발트 트레일은 사람들이 스위스 하면 떠올리는 모든 요소들을 다 담고 있었다. 너무 감사한 마음에 신께 다시 기도를 드렸다. 이 여행은 40%, 50%짜리 여행이 아니었구나..
나는 배고픔도 잊고 경치에 홀려 미친 사람마냥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Gletscherschlucht와 베터호른-Upper 그린델발트 트레일의 이 조합은 아직까지도 최고의 트레일 코스로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저 목가적인 풍경 뒤에 우람하게 자리한 아이거를 보라. 그 유명한 North Face다. 깍아지른듯한 화강암 절벽과 흩날리던 장식한 눈, 그리고 바로 눈 앞의 평화로운 목장 풍경. 날씨도 한몫했다. 기온이 온화하고 구름이 햇빛을 막아주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여겨졌다. 마치 지난 5일간의 그린델발트 여행 보상을 오늘 받는구나 싶었다.
목장 사이를 지나
드디어 점심 먹을 벤치를 찾았다. 아이거를 보면서 먹는 바나나라니...
점심을 먹고 내려가는 길. 2시간 정도 내려왔을까? 이쯤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시 다리를 건너 조금 오르막길을 오르자 Upper 그린델발트가 나타났다.
시내까지는 내려갈 자신이 없어서 주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저길 갔었다.
저 길 어디에서..
PS.
혹시 이 글을 보고 나중에 그린델발트 트래킹을 계획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추가로 글을 적는다.
1. 정확한 정보 (Jungfrau region trails)
2. 위 사이트는 정확하고 공식적인 지도도 다운받을 수 있으나, 정보가 제한적이므로 All Trails나 Komoot에서 Grindelwald로 검색해서 살펴보시는 게 더 많은 정보를 얻으실 수 있다.
3. 체력
기본적으로 북한산, 좀 더 나아가 한라산 등산 정도는 가능하신 분들에게 권장드린다. All Trails에서는 트레일 코스를 Hard, Medium, Easy, Moderate 4등급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Moderate가 청계산이나 인왕산, Easy가 북한산, Medium이 한라산/지리산/설악산 정도라고 보시면 된다. Hard는 나도 가보지 못하고 유튜브로만 봤다;;
4. 경비 (먹거리)
이미 들으신 것처럼 식당은 매우 비싸다. 커피나 맥주는 서울 물가와 비슷하지만, 만들어서 파는 요리는 저렴한 것조차도 약 4~5만원부터 시작한다. 반면 마트 물가는 서울과 크게 차이 없다. 독일/프랑스/스위스의 마트들은 대부분 제빵소가 있어서 만들어진 빵들을 파는데, 독일/프랑스의 마트 빵들은 천원짜리도 수두룩하지만, 스위스 마트 빵들은 약간 비싸긴 하지만, 못살 정도는 아니다. 라면은 3~4천원선. 나처럼 주로 과일이나 유제품을 구매하신다면 오히려 서울보다 더 싸다. 약간이지만..
5. 경비 (숙소)
안타깝게도 숙소는 매우 비싸다. 나는 잦은 이동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린텔발트 중심지에 묶었는데, 1인실 비수기임에도 1박 20~30만원 정도를 지불했다. 성수기 숙박비는 3인 가족 기준 1박 50만원을 넘겨야 비로소 괜찮은 호텔이나 샬레를 구할 수 있다.
6. 경비 (교통)
유래일패스나 스위스 교통패스가 아니더라도 일찍 예약만 한다면 열차(SBB) 앱에서도 저렴한 할인 티켓을 구매할 수 있다. 바로 목전에 구매하는 것은 꽤 비싸다. 그러나 운이 좋으면 당일에도 할인 티켓이 나올 때가 있다. 그린델발트에 숙소를 정하면 무료 버스 티켓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티켓이 없더라도 말만 하면, 어떨 때는 버스 기사님이 묻지도 않고 태워주더라). 피르스트나 융프라우, 라우터부르넨, 멘리헨 등은 그린델발트가 아니므로 따로 티켓을 구매해야 하는데, 이게 제법 비싸다;;
6. 시기
이미 4개의 글에서 누차 말했듯이 알프스 트래킹을 계획하고 계시다면 무조건 6월~9월 사이에 가시기를 권장드린다. 다만 이때는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번잡하고 숙소 구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너라면 언제 다시 가겠는가? 하고 묻는다면 5월 셋째주라고 답할 것이다.
7. 언어
이 지역은 독일어를 쓰지만 영어는 어디서든 통용된다. 식당 종업원이나 매표소, 길가다가 만나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대부분 영어가 사용된다. 내가 척 봐도 동양인인데, 독일어로 말 거는 사람은 한 명도 못봤다.
8. 준비물
크게 의류, 트래킹 장비, 기타 개인적인 여행 물품으로 구분할 수 있을텐데, 트래킹과 관련된 준비물만 거론하자면... 의류는 3레이어(티셔츠, 경량 패딩, 바람막이) 상의, 질기고 때에 따라서 반바지로 변신 가능한 긴바지가 필요하고, 신발은 고어텍스 소재로 만들어진 미드컷을 권한다. 하이컷은 트래킹 도중 신고 벗기가 조금 부담스럽고, 로우컷은 발목을 잡아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어텍스를 굳이 강조한 것은 진흙이나 눈길, 얕은 시냇물을 건너갈 일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챙이 긴 모자, 자외선 차단 선글라스, 가볍고 강한 탄성의 스틱은 필수다. 셋 중 어느 하나도 빠뜨려서는 안된다. 양말은 중간에 갈아신도록 두 켤레 이상 가지고 다녀야 한다. 그 외에 썬크림, 1리터 이상의 물, 과일이나 에너지바류의 행동식도 권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