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ing 취미
한달에 3~400km를 걷는다는 얘기를 하면 상대방의 반응은 셋중 하나다. 못믿거나 놀라거나 막연해하거나..
먼저 꺼낸 얘기도 아니었다. 그냥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아 요즘 음주를 자제하고 운동을 조금씩 합니다", "무슨 운동이요?", "걷기요", "걷기? 걷기가 운동이 되나요?", "네. 그게 그냥 걷는다기 보다는..."하고 3~400km 얘기가 나온다.
못믿겠다는 반응도 이해가 간다. 한달에 3~400km를 걷기 위해서는 평일에 만보 이상 걷고, 주말 3일(금,토,일)에는 도합 5~70km 정도를 걸어야 가능하다. 하루에 30km를 걸으려면 서울 강남 출발이라고 가정할 때 수원 광교호수공원까지 가야 하는 거리이다. 길이 안막혀도 버스로 40분이 걸려야 도달하는 거리이다.
이전에 쓴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걷기할 때에는 항상 카메라를 동반한다. 휴대폰을 놔두고 다니는 경우는 있어도(스마트워치에서 전화받기 가능) 카메라와 이어폰을 두고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카메라는 작은 것(leica d-lux 5, panasonic LX10)과 풀프레임(sony a7c) 중에서 날씨를 보고 하나를 골라 나간다. 주로 풍경사진을 찍기 때문에 렌즈는 초광각(20mm, 24mm)으로 챙긴다. 원래 18mm짜리도 있었지만, 이전 글에서 서술했듯이 바닷물에 퐁당 빠뜨려서 못쓰게 되었다.
음악듣는 것도 중요하다. 걸으면서 음악듣고 사진찍는 3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한다. 성격이 민감한 탓에 소리 품질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데, 평상시에는 간편하게 에어팟프로를 쓰지만, 장시간 음악들을 때에는 무선 헤드폰과 유선 이어폰 중에 하나를 챙긴다. 유선 이어폰을 쓸 때에는 헤드폰용 소형 DAC까지 연결해서 나가는 일도 있다. 이쯤되면 보부상이 따로 없다. 이것저것 담으려면 가방도 필요하다. 평상시에는 크로스백을 쓰다가 장거리 구간이나 겨울에는 15l 배낭을 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장시간 걸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발이다. 트래킹의 세계에서는 나이키나 아디다스가 유명세를 떨치지 못한다. 살로만, 호카, 알트라와 같은 브랜드가 유명하다. 나는 발폭이 넓은 편이라서 알트라를 선호하는데 올림푸스, 론픽, 올웨더를 용도에 따라 번갈아가면서 신는다. 사실 다 필요없고 좋은 신발만 있으면 된다. 기왕이면 햇빛을 차단하기 위한 모자와 선글라스가 있으면 좋고, 그 다음으로는 땀흡수가 잘되는 상하의, 그리고 걸으면서 즐길 카메라와 이어폰, 배고프면 먹어야 할 간식거리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겨울에는 챙길 짐들이 더 많아진다. 모자, 넥워머, 장갑, 종아리압박대는 기본이고, 눈보라가 부는 날에는 바라클라바와 스패츠까지 챙겨 나간 일도 있었다. 그쯤되면 거의 등산 복장하고 유사해진다. 가끔 겨울에 등산할 때에는 스틱과 아이젠 등이 추가된다. 신발도 로우컷에서 미드컷으로 바뀌고 모자도 트러커햇이 아닌 챙이 긴 모자로 바뀐다. 3시간 이상 걸을 때에는 먹을 것을 챙겨가는 것이 좋다. 특히 탄수화물 섭취가 중요해서 설탕이 안들어가있는 에너지바와 물을 챙긴다. 등산할 때에는 뜨거운 물과 사발면이 추가되고..
겨울은 의외로 걷기 좋은 계절이다. 추운 것은 20분 정도 걷다보면 몸에 열이 올라서 아무렇지 않고, 눈이 와서 길 미끄러운 것만 신경쓰면 된다. 가장 괴로운 계절은 여름이다. 특히 7월말~8월의 한여름은 야외활동을 포기하고 에어컨 잘 나오는 실내 피트니스장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그러나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면 싫증이 난다. 그나마 봄에는 초록이 만연하고 꽃들이 활짝 웃어줘서 싫증이 덜한데, 여름에는 더위로 인해, 가을에는 낙엽으로 인해, 겨울에는 삭막한 풍경과 미끄러운 길로 인해 애로가 생긴다. 그래서 '걷기쟁이'에게는 멋진 길에 대한 낭만이 있다. 일종의 버킷리스트와 같다.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제주올레길이라는 기가 막힌 걷기 코스가 있다. 올레길은 그린델발트, 돌로미티 등 세계적인 하이킹 코스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차로 제주도를 다닌 것은 영화의 스포나 하이라이트만 본 것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제주도를 경험하려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야 한다고'
아쉽게도 제주올레길도 이제 거의 돌았다. 찔끔 찔끔 시간날때마다 내려가서 2~3일씩 걸었는데 벌써 한바퀴를 뺑 돌았다. 10코스부터는 체력에 자신감이 생겨서 하루에 한코스 반에서 두코스씩 돌기 시작했는데, 이젠 얼마 남지 않은 아쉬움 때문에 두 코스를 한번에 도는 것도 망설여진다.
전세계적으로 하이커들에게 인기있는 코스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 네팔 히말라야 ABC(페디~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EBC(~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안나푸르나 서킷 등..
- 이탈리아 돌로미티 알타비아 1~10코스. 세체다, 알페데시우시 등
-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뮌헨 to 베니스 트래킹
-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 투르드몽블랑
- 스위스 하이알파인코스, 트랜스스위스 트레일
- 오스트리아 잘츠카머쿠트 트레일
- 영국 횡단 CTC(Coast to Coast), 스코틀랜드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
- 노르웨이 세락볼튼, 트룰퉁가, 프레이케스톨렌
- 스웨덴 쿵스레덴
- 뉴질랜드 밀포트 트랙 (9 great walks)
- 칠레&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트레일
- 페루 잉카 트레일
- 중국 차마고도 호도협
- 미국 에팔레치아 트레일(AT),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콘티넨털 디바이드 트레일(CDT)
- 캐나다 뉴펀들랜드, 록키 트래킹
코스에 따라서 난이도가 조금씩 다르다. 돌로미티 알타비아에서는 비아페레타를 위한 장비가 필요(1코스 제외)하고 네팔 ABC, EBC, 페루 잉카 트레일은 고산병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스웨덴 쿵스레덴은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 피엘라벤에서 지원하며, 뉴질랜드 밀포트 트랙은 하루 90명만 입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미리 예약이 필요하다. 가장 기간이 많이 소요되는 것은 미국 AT이다. 거의 반년이 소요된다. AT나 PCT는 거리가 무려 4,000km를 넘고, 중간 기착지에서 택배를 통해 용품을 교체하거나 가족들을 만나기도 한다. 미국 사람들이 해외에 잘 안나가는 이유가 어짜피 미국내에 다 있기 때문이라던가? 예전에 만났던 아버지 지인중에 재미교포가 한분 있었는데 이분은 '걷기(tracking)'에 미쳐있는 분이었다(본인 표현). 그 힘들다는 미국 AT, PCT는 물론 돌로미티 알타비아, 우리나라 백두대간, 네팔 EBC/ABC, 스위스 하이알파인코스도 돌아보셨다고 한다. 그 분은 알프스나 히말라야보다 미국의 자연경관이 더 대단하다고 자랑하셨는데, 나는 성향상 알프스를 좋아하는 편이라 한귀로 흘려들었다.
https://www.youtube.com/@jpacking7327
이 유튜브 링크는 구독자가 891명 밖에 안되는 J Packing이라는 분의 채널이다. 왜 구독자가 안늘까 의문스럽지만, 어쨌든 스위스 하이알파인코스를 알 수 있는 고마운 영상들을 만날 수 있다.
그냥 걷는건 데 굳이 외국까지 나가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이미 밝혔지만 우리나라에는 제주 올레길이란 훌륭한 트래킹 코스가 있다. 그러나 어떤 트래킹 코스를 완주했다는 것은 다음에 더 넓은 자연을 만날 수 있다는 좋은 핑계가 되기도 한다. 스마트폰 붙잡고 카페에 앉아있는 것보다는 지구가 더 좋아할 취미가 아닐까?
원래 걷기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걷다보니 잡념이 사라지고, 갈등했던 고민들을 정리할 수 있었고, 차로 다닐 때는 몰랐던 자연과 사람, 도시와 마을,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었다. 차를 타고 길가다가 멈추는 것은 쉽지 않을 때도 많지만, 걷는 도중에는 언제든지 멈출 수 있다.
앞만 보고 가지 않고 언제든지 멈춰 서서 무언가에 망연해질 수 있는 자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