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다녀온 제주 기행문을 올린다. 일년에 대여섯차례나 가면서 무슨 기행문까지 올리냐 싶겠지만,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사랑받는 세계인의 도시' 제주도는 적어도 나한테는 사랑받는 섬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난번에 17코스를 마저 못끝내서 내두동 연대포구로부터 시작했다. 이틀동안 2.5코스 정도를 걷는 거리인데, 다른 때였다면 3~4코스도 소화할 수 있었겠으나 더운 날씨 때문에 이 정도도 무리였다. 7~9월은 방콕, 대만 여행이 잡혀있는 이유도 있지만. 제주도에 안오기로 했다.
내두동 스타트.
사진에는 없지만(물론 사진은 있으나 용량 문제로 올리지 못한다) 시작은 이호태우 해변을 거쳐서 제주 동문시장으로 들어가는 코스였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서 운동을 나오신 동네 분들이 많았다. 제주공항 근처인에도 부근의 외도동이나 도두동에 비해서 이쪽은 비행 소음이 심하지 않았다.
ㅂ ㅣ ㅎ ㅐ ㅇ ㄱ ㅣ ㄴ ㅏ ㄴ ㄷ ㅏ
이번에는 20-40mm 렌즈를 가져갔는데, 무겁진 않지만 제법 부피감이 있다. 본체(A7C)보다 두 배 가량 더 커보일 정도인데, 다행히 사진 품질은 마음에 들었다. 올라간 사진들이 다소 흐릿하게 나온 것은 크기를 인위적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브런치에는 20M 이상 이미지를 올릴 수 없다. 아는 지인이 돈벌어서 카메라 회사에 다 갖다바친다고 푸념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나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나는 오디오 회사, 스마트기기 회사들에도 갖다바치고 있으니...
도두동을 지나니 프랑스혁명 당시 왕비 이름을 딴 카페가 있길래 들어가서 잠시 더위를 식혔다. 마리 왕비는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말 한적이 없을 뿐더러 생각보다 교양있는 여자였다고 한다. 하긴 누구(마리아 테레지아)한테서 가정교육을 받았는데 그럴 리가 없지. 찻잔이 너무 작았다.
제주도에 100번쯤 왔었을텐데.. 이번에 처음으로 제주성을 봤다. 역사소설에서 가끔 접할때마다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해서 그런지 낯설지 않았다. 정갈하고 차분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제주시를 지나는 올레길 코스도 생각보다 볼 게 많았다. 출발한지 1시간 정도 지난 무렵에 제주공항 근처를 벗어나서 제주시 중심부에 이르렀는데, 아직은 이른 아침인데도 관광객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제주도에는 어딜거나 담장 벽화를 만날 수 있다. 그 수준이나 개성도 제법 볼만하다. 언제 한번 제주도 벽화 사진전을 올려볼까 생각중이다. 벽화는 찍기도 쉽다.
동문시장
아직 이른 오전인데도 문 안연 가게가 없었고 사람들도 많았다. 여기서 뭘 살까, 뭘 먹을까 고민하면서 무의식중에 올레길 표식을 따라서 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새 시장 바깥으로 나왔다. 어 이게 아닌데? 하고 발길을 돌리려다가 그냥 길을 갔다. 찾을 때는 그렇게 안보이던 올레길 표식이 여기서는 왜 이렇게 잘 보여...
길을 가다보니 버스정류장에 붙어 있길래 찍어봤다.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뭘까? 아동학대인 것 같긴 한데.. 이제 막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이 쓴 글 같다. 옆에 있다면 뭐가 문제인 지 알려주고 싶었다.
제주 올레길 코스를 걷다보면 가장 많이 만나는 것들 중 하나가 4.3 항쟁 관련 유적이나 기념관들이다. 도데체 얼마나 죽였길래 이렇게 많이 만날 수 있을까?
제주시 근처는 그나마 기념관이 잘 갖춰져 있었지만, 남쪽 모슬포나 서쪽 한경면 근처 유적들은 탑과 분향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경우도 많다. 기념비에 씌여져 있는 내용들을 보면 '어디 마을의 누구 아들, 청년이 언제 갑자기 잡혀가서 어디에서 변을 당했다. 몇월몇일몇시경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들이닥쳐서 누구누구를 갑자기 잡아다가 이리로 데려와서 집단으로 사살했다'는 식으로 매우 구체적인 내용들이 적혀 있다. 살아남은 동네 사람들이 그 날의 기억을 남겨놓은 것이리라. 올레길에서 만난 4.3 유적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생하게 기록이 적혀 있다. 처음 몇 번은 그 깨알같은 글씨를 다 읽어보았지만, 마음이 불편하고 아련해져서 그 다음부터는 조의만 올리고 떠난다. 이런 구체적인 물증들이 있는데도 역사를 왜곡하려들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17코스가 끝나고 18코스가 시작됐다. 걷다보면 지금까지 가장 좋았던 코스가 어디였을까 계속 되묻게 된다. 결론은 딱히 말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반대로 안좋았던 코스는 어디였나는 질문에는 바로 대답할 수 있지만, 편견을 심어줄까봐 이 자리에 올리지는 않으련다.
이날 점심은 김치찌게. 제주시를 벗어나기 전에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우연히 들른 집이다. 로컬식당인지라 토요일인데도 나와서 일하는 근처의 직장인들, 경찰관들, 자영업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 먹고 계산하려는데 가게 사장님이 '혼자 다니면 안외롭냐? 사진찍는 사람이냐? 올레길 걷는 사람이냐?'고 질문을 쏟아내시기에 '올레길 걸으며 사진찍는 게 너무 즐거운 사람이다'고 얘기해주니 허허 웃으신다.
전날 저녁에 도착하고나서 먹은 흑돼지
미식가하고는 거리가 먼 부류라서 음식 품평은 조심스럽지만 제주도 올레길 걸으면서 정말 맛있게 먹은 음식점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반면에 맛없다고 할만한 음식점도 없었다. 대부분 무난하다고 할까?
어디서나 한라산이 보이는 건 마찬가지지만 남쪽에서 봤을 때와 서쪽에서 봤을 때의 느낌은 새삼 다르다. 이번에는 북쪽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이다. 사실 날이 흐려서 (더위에는 다행이었지만) 형태만 희미하게 보였다.
18코스는 초반에 사리봉을 올라야 한다. 이 때가 출발한 지 2시간 정도 흐른 시점이었는데 체력은 문제 없었으나, 더위가 문제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올랐더니 제주항이 이렇게 멋지게 나타난다.
조업준비로 바쁜신 동네분들
주말임에도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동네분들. 양파 수확이 한창이었다. 실례가 될까봐 얼굴은 가렸다.
15km를 넘으면 슬슬 다리가 아파온다. 배낭 뿐만 아니라, 카메라를 메고 다니면서 수시로 찍다보니 자세가 별로 좋지 않다. 게다가 최근에는 일이 바빠서 운동도 게을리했었다. 그 여파 때문에 다리가 고생이다. 중간 중간에 계속 스트레칭을 하고 쉬기도 하지만 앉을만한 장소조차 눈에 안띄일 때는 2시간이든 3시간이든 계속 걸을 수 밖에 없다. 유튜버 차박차박님이 가게에서 산 음식 먹을 자리를 찾기 위해서 내리 2시간을 걷는 것을 보고 웃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내가 그랬다.
나같이 혼자 다니는 올레길 동료가 보여서 사진을 찍었다. 저렇게 배낭만 메고 다니면 얼마나 편할까? (이튿날 19코스 마지막 길에 실천했다) 카메라 없이 트래킹을 갈 생각조차 없으면서도 5시간 이상 걷다보면 카메라가 짐처럼 느껴진다.
이날 23km, 4만보를 걸었고, 89층을 올랐으며, 2000kcal를 소모했고, 400여장의 사진을 찍었다. 커리어하이가 40km, 5만몇천보였는데 이날따라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 답은 더위였다. 도중에 옷을 두번 갈아입고 세번 세수했다. 썬크림도 세번이나 다시 발랐다. 물과 커피를 엄청 마셨음에도 걷는내내 소변이 마렵지 않았다.
18코스를 아주 약간만 남겨놓고 버스를 타고 다시 함덕해변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