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데 있다.
- Marcel Proust
이튿날이 됐다.
전날 남겨뒀던 18코스 마지막 부분으로부터 트래킹을 시작했다. 아침 9시까지 비가 내렸기 때문에 이 날은 조금 늦게 출발했다. 19코스 시작점에 올레길 안내소가 있었는데 기념품을 사려고 들렸다가 사진을 찍혔다. 비가 아직 안그쳤는데도 다니는 게 기특했던 모양이다. 올레길 블로그에 올리신단다.
비가 와서인지 어제보다는 확실히 덜 더웠지만 그래도 습기가 많아서 후덥지근했다. 그늘 하나 없는 도로에서 런닝하거나 자전거타는 분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날처럼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한라산이 보인다.
꽃들도 찍고
멋진 항구도 찍고
나도 찍는다
혼자 다닐 때는 스스로를 찍을 방법이 없어서(가끔, 정말 가끔 스마트폰 셀카를 이용하지만;;) 이렇게 도로에 놓인 거울들을 찍는다. 올레길에서만 100장 정도 찍었던 것 같다.
또 걷고 걸어 함덕 해변에 도착했다. 1시간여를 걷는동안 사람 구경하기 힘들었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니 당황스러웠다. 올레길 걷다보면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남쪽의 7, 8코스는 서귀포, 중문 근처의 주요 관광지들을 대부분 거치는지라 사람 구경하고 차조심하느라 정신없다.
숙소를 함덕해변 근처에 잡았기 때문에 저녁에 낙조를 촬영하기 위해서 이 해변에 다시 나왔다.
이게 뭘까?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을 봐서 서핑은 아닌데?
어떤 분이 해변을 아주 열심히 찍고 있었다. 동병상련이요 유유상종이라고 했으니 가까이 가서 이 분은 뭘 이렇게 찍는걸까 하고 봤다. 스마트폰으로 저 먼 원경을 찍는 것은 한계가 있을텐데도 불구하고 이 분은 해변을 열심히 찍고 계셨다.
서우봉 올라가기
함덕해변을 벗어나니 갑자기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19코스에는 서우봉이 난코스이다. 200m도 안되는 낮은 구릉이라 우습게 볼 수 있지만, 오래 걸어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 꾸준히 오른다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 지금까지 가장 힘들었던 오르막길은 9코스의 윌라봉, 검은오름과 10코스의 모슬봉이었다.
엥? 갑자기 대몽항전 시기 이 곳이 상륙지였다는 기념비가 나타났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들은 강화도로 피신갔던 최우정권이 무너지자 그를 지키던 삼별초가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서 몽고군에 끝까지 항쟁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몽골군은 삼별초도 그렇고 이후에 있었던 일본정벌에서도 고려군을 앞잡이로 내세웠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몽골군보다 고려군이 더 잘 싸웠다지?
꽤 올라온 것 같지만 이제 중턱이다.
서우봉 정상에서
여기서 보면 낙조가 멋있단다. 그런데 이날 저녁에 여기 올라갈 생각을 못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밤에 올라가기에는 너무 컴컴했다.
멋진 집이다. 올레길을 다녀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나 또한 '만약 제주도로 내려온다면 어디가 가장 좋을까?'를 수십번 넘게 고민해봤다. 물론 결론도 가지고 있다.
이 집 주인분은 다소 괴짜일듯..
서우봉을 내려와서 한참 마을길을 돌고도니 동네 아이들이 수영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진 찍어도 되니? 하고 묻자 손을 흔든다. 우리 아들도 이런 환경에서 자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본다.
전남 해남과 가장 가깝다는 관곳. 말도 안되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혹시 해남이 보일까 멀리 수평선을 내다봤다. 아는분도 계시겠지만 수평선까지의 거리는 생각만큼 그렇게 멀지 않다.
관곶을 지나자 식당이 듬성듬성 나타났다. 배고팠는데 잘 됐다 싶어서 아무데나 사람이 많은 식당에 들어갔다. 원래 회덮밥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재료가 떨어졌는지 주문이 안된다고 해서 전복찌게를 시켰다. 맛은 그냥 그랬다.
해안길이 끝나고 내륙으로 접어든다. 19코스 전반부는 해안길이고, 후반부는 제주 북서부의 야생림을 걷는 코스이다. 길 자체는 평탄하고 그늘도 있어서 걷기 좋다.
그런데 11~14코스의 곶자왈에 내 눈높이가 올라가서 그런지 몰라도 19코스 후반의 야생림은 별반 볼 게 없었다. 몇 장 찍은 게 있긴 한데, 더 이상 볼 게 없을 것 같아서 아예 카메라를 배낭에 넣어버렸다. 그랬더니....
어찌나 걷기가 편하던지 새삼 놀랄 정도였다.
숲 한가운데에 갑자기 축구장이 나타났다. 엥?
한 6km정도 남은 길을 걷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주 약간 19코스를 남겨놓은채 버스를 타고 함덕에 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이렇게 지금과 나중을 위해서 버스 정류장을 기준으로 여정을 시작하고 끝내는 게 좋다.
숙소에서 조금 쉬다가 밥을 먹기 위해서 함덕해변으로 향했다. 근처에 고기국수 맛집이 있길래 들렸는데, 서비스로 수육까지 주셔서 소주도 한잔 했다.
내 많고 많은 단점 중에 하나가 많이 못먹는다는 것인데, 이날은 많이 걸어서인지 음식이 맛있어서인지 저걸(고기국수+만두+수육+소주) 다 먹었다.
밥도 먹었겠다. 푸짐한 마음으로 밖에 나오니 갑자기 하늘이 이상하다. 사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진 찍기 좋은 시간대가 석양 무렵이다. 옳다구나 지금이다.
해변에 나가서 아이들과 찍은 사진들도 있는데 (물론 모르는 얘들인데 어쩌다보니 친해졌다) 걔네 부모님 얼굴도 나오기에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올리지 않는다. 이날 저녁에 어찌나 셔터를 눌러댔는지 사진 정리가 부담될 정도로 많은 사진을 찍었다.
이 날은 20km, 3만보도 채 걷지 않았다. 비 때문에 늦게 출발하기도 했고, 공기중에 습기가 가득해서 어제만큼 후덥지근했다. 이제 남은 건 2코스. 저녁에 고기국수를 안주로 한라산 소주를 마시면서 결심했다.
한 바퀴 더 돌아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