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공공기관의 강연을 위해 월요일 휴가를 내고 속초에 다녀왔다. 연수원이 속초에 있다는 말에 설악산을 가면 좋겠구나 하고 강연의뢰를 수락했지만 정작 날짜가 가까와오자 하루 하루 체감되는 무더위 때문에 설악산은 언감생심이 되었다.
몇시간 강의를 위해서 그 먼 거리를 간다는 게 (게다가 설악산도 안갈건데) 후회막급이었지만,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지 하며 귀한 연차를 써서 월요일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코로나가 터졌던 2020년, 잡아놨던 해외여행 계획(러시아, 대만, 케언즈)들 대신 선택했던 게 서울-양양고속도로 상의 명산 탐방이었다. 금요일 오후 반반차를 내고 홍천, 인제, 양양 근방의 명산들을 두루 다녔다. 특히 인제를 자주 갔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받던 스트레스를 자연에서 풀었던 시기였다. 이번에 속초 가는 길에 인제 휴게소에 들려서 당시의 느낌을 떠올려봤다.
10시 속초 도착. 휴가시즌 전의 평일이었던지라 평소처럼 과속 없이 평온하게 운전을 해왔는데도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강연은 2시였다. 뭘 할까? 막내가 만*닭강정을 사다달라고 했는데 바로 가긴 좀 그랬다. 설악산 케이블카라도 타러 갈까? 고민 하다가 한번도 안가봤던 영랑호로 향했다.
주차하고 내려서 처음 받은 느낌은 '생각보다 좋은데?'였다. 호수변을 따라서 도보/자전거길이 잘 구비되어 있었고 무더운 날씨였지만 나무가 잘 심어져 있어서 그늘을 따라 걸을 수 있어 보였다.
좋아 한바퀴 돌아보자. 한바퀴 빙 돌면 6.5km 정도 된다고 한다.
처음에 만난 건 여러 바위들. 재미있다. 아직은 땀도 안흐르고..
뭐 봐?
이때까지는 괜찮았다. 호수 건너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뺨을 기분좋게 간지럽혔다.
계속 걷다보니 중간에 호수를 건너가는 다리가 있었는데 이때부터 한동안 뙤약볕 구간이 시작됐다. 11시를 넘어설 무렵이었다. 손수건이라도 가지고 내릴껄. 이어폰도 없고. 달랑 카메라와 휴대폰만 들고 나온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런 구조물이 나오면 연습하는셈 치고 꼭 사진을 찍는다. 사진찍는 기본 연습중에 하나가 3축(상하, 좌우, 수평)을 동시에 맞추는 것이다. 완벽한 비례!
햇볕을 피하지 못하고 계속 걸었다. 이번에는 모자를 안가져왔음을 자책했다. 풍광은 멋있었지만 옷도 한벌 밖에 없는데 강연전에 땀으로 범범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시작했다.
드디어 다시 그늘진 길이 나왔다. 체감되는 온도 변화가 어찌나 크던지 살짝 놀랐다.
저 건너편이 처음에 출발했던 주차장이다. 이제 반바퀴를 돌았다는 건데.. 다시 햇볕 아래로 나서는 게 걱정된다. 체력과 무관하게 더위는 참기 어렵다. 아니 더위보다는 땀나는 게 싫다.
1/3 정도를 남겨놓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인도교가 있길래 이 길로 가기로 했다.
인도교 위야말로 그늘 하나 없었는데 호수 위라 그런지 바람이 선선하다. 생각보다 시원했다. 금새 기분이 좋아져서 다리를 건너다말고 여기 저기 셔터를 눌렀다.
호수 북쪽에는 이렇게 버려진 집들이 몇 채 있었다. 위치도 좋고 집도 깔끔하니 나쁘지 않은것 같은데 왜 예닐곱채의 집들이 폐가처럼 방치되어 있을까? 내가 여기서 살까? 생각하며 기웃거렸다.
최종적으로 걸은 거리는 약 5km. 1/3을 남겨놓은 지점에서 둘레길이 아닌, 인도교로 호수를 건너다보니 1.5km 정도는 못가봤다. 석촌호수가 2.5km니까 영랑호수길은 그보다 2배를 조금 넘는 길이다. 석촌호수길이 도심의 건물들 사이에서 자연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면 영랑호수길은 바닷가 인근이면서 눈을 들면 저멀리 설악산이 보이는 재미를 전달해주었다. 걷는 코스도 나무랄 데 없이 잘 갖춰져 있다.
만*닭강정을 다섯박스 사서 트렁크에 싣고, 설악산국립공원 입구까지만 갔다가 점심 먹고 강연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영랑호는 겨울에 한번 더 오고 싶어졌다. 속초까지 와서 바다도 산도 아닌, 호수길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