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작가는 비극적이고 불합리한 현실을 희극적으로 풀어낸다. 제목에서 이미 나타나듯이, 그 비극을 관통하는 중요한 소재는 매혈이다. 지식과 재능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것이 품위 있게 돈 버는 방법의 첫째라면, 몸의 힘을 이용해서 버는 것은 둘째이고, 몸 자체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것은 가장 저급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몸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일은 벌거벗은 채로 태어나는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산인 몸을 축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어지간하면 몸을 축내는 일을 하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는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좋은 방법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몸이라는 가장 중요한 자산을 망가트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이 소설의 첫 번째 비극적인 현실을 볼 수 있다.
허삼관은 처음에는 매혈에 대해 별 생각이 없다. 남들이 한다고 하니 자신도 한 번 해볼까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매혈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는 집안에 돈이 필요한 순간에 조금씩 숨겨둔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 쓰듯이 매혈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일락이의 병원비를 위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기며 매혈을 한다. 허삼관과 그밖에 인물들이 피를 팔게 된 이유는 노동 버는 돈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근룡이와 방씨가 피를 파는 이유는 집을 짓고, 결혼을 하기 위해서다. 농사를 지어서 버는 돈은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여서 농사만 짓다가는 집도 없고 결혼도 못하는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 팔자인데 피를 팔아서 그 현실을 타계하고자 한다. 소설의 묘사에 따르면 시골 사람들에게는 피를 파는 행위가 보편적인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는 피도 안 팔아봤으면서 어떻게 뼈대가 튼튼하다고 할 수 있냐고 말하고, 삼촌도 이 마을에서는 피를 안 팔아본 남자는 여자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계화와 약혼했던 남자가 일 년이나 성 안에 가서 피를 팔지 않았다는 말로 미뤄보건대, 아마도 그 남자는 피를 팔다가 몸을 버린 것일 것이다. 이런 정황들을 살펴봤을 때, 이미 매혈이 시골 사람들의 삶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골 사람들도 매혈이 목숨을 파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매혈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삶은 각박하다.
반면, 시골 사람들과 달리 성 안 사람들은 매혈이 위험한 일이고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허옥란이 처음 허삼관이 피를 팔고 온 것을 알았을 때, 앞 선 시골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집을 팔고 땅을 팔고 몸을 팔았으면 팔았지 하필이면 피를 파냐는 말에서 매혈을 금기시하는 도시 사람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시골 사람들보다는 형편이 나은 편이었던 도시 사람들에게 매혈은 어리석은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렇게 매혈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허옥란도 나중에는 허삼관에게 피를 팔고 오라고 종용하게 된다. 이는 결코 매혈의 대한 생각이 바뀌어서가 아니다. 피라도 팔지 않으면 그 고생스러운 삶을 이어나갈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골에만 머물러 있던 가난이 사라지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영역을 넓혀서 성안까지 침범했음을 보여준다.
아이러니는 매혈이라는 행위가 결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더 가진 자도 덜 가진 자도 없어야 한다는 공산주의의 기치 아래서 주인공은 평등하게, 남들만큼 살기 위해 매혈이라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그리고 허삼관의 매혈은 사회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문화 대혁명을 거치면서 더욱 빈번하게 그리고 더욱 비참한 모습으로 일어난다. 일락이의 생산 대장에게 뇌물을 주기 위해서 피를 팔고, 이락이의 생산 대장에게 저녁을 대접하기 위해서 한 달 후에 또 피를 팔게 된다. 저 한자리 꿰차고 있는 사람들이 정직한 사람들이었다면, 아니 그보다 높은 사람들이 성실한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했더라면 허삼관이 피를 팔러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락이가 병에서 낫고 그 뒤로 많은 시간이 흐른 후 허삼관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피를 팔기로 한다. 그리고 새로운 혈두에게 늙은이의 피는 가구 칠장이에게나 팔라는 조롱을 듣는다. 그 말은 물론 허삼관에게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진정으로 주목할 점은 아직도 혈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허삼관이 처음 피를 판 이후로 4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피를 팔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삼관의 집은 이제 돈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여유로워져서 더 이상 피를 팔지 않아도 되지만, 성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과 시골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매혈이 삶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두 번째 비극적인 현실은 위정자들의 어리석은 선택이 한 힘없는 개인의 삶을 통째로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허삼관의 어머니는 허삼관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국민당 연대장에게 시집을 갔다가 이후 어린 허삼관을 두고 도망을 가버린다. 공산당의 중국 본토 점령과 국민당의 대만으로의 퇴각을 시작으로 허삼관 삶은 역사의 부침과 그 궤를 같이하게 된다. 1958년 시작된 대약진 운동은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실패로 끝나게 되고, 대약진 운동으로 노동력의 유출을 겪게 된 농촌은 농업생산력의 급격한 저하에 직면하게 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연이은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소련과의 관계 악화로 경제원조 마저 끊기게 되자 중국 전국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허삼과의 집도 이런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허옥란이 기지를 발휘한 덕에 남들보다는 나은 형편이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피를 팔러 가게 된다. 그리고 병원에서 만난 혈두의 혈색이 도는 얼굴은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비극을 강조한다. 그 뒤에 만난 문혁은 더욱 비참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는 갈 길을 잃고 내 옆의 이웃과 형제자매, 부모에게로 향한다. 사람이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자식이 부모를 부정하는 것이 정의가 되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작가의 기록과 같이 모택동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중국판 마녀사냥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집안에서 벌어진 비판 투쟁 대회는 허옥란과 허삼관이 서로를 용서하면서 가족 간의 신의를 지키며 끝나지만, 일락이와 이락이가 하방을 갔다가 병을 얻게 되면서 허삼관 가족은 다시 위기에 빠진다. 작가는 이런 중국의 역사적 사실들을 시간적 배경으로 사용함으로써 비극성과 사실성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중국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이렇게 목숨을 담보로 잡혀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허삼관과 그 주위 사람들은 인간의 도리를 지키며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들의 말은 어찌 보면 토속적이고 노골적이며 예의를 차리지 않아 상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행동 또한 교양 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이웃과 머리채를 잡고 싸우거나, 찾아가서 한바탕 욕을 퍼붓거나, 동네방네 큰소리로 집안일을 떠벌린다. 주인공인 허삼관 또한 허옥란에게 창녀라고 하거나 일락이에게 잡종의 자식이라고 말하고, 이락이와 삼락이에게 커서 하소용의 딸들을 꼭 강간해버리라고 말하는 등 불쾌한 말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허삼관은 하소용이 죽을 고비에 놓였을 때 원한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일단 사람부터 살려야 한다며 일락이를 설득해 하소용의 영혼을 부르게 한다. 그때 허삼관이 일락이에게 했던 말이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각박한 현실에서도 양심을 잃지 말라는 허삼관의 말은 황금을 쫓기 위해 양심 따위는 내던지는 현대인들의 모습과는 대비를 이룬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예의가 없고 무식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현대의 많이 배운 교양 있는 사람들보다 더욱 인간적이다. 아픈 일락이를 위해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흔쾌히 돈을 건네는 이웃들이 있다. 허삼관이 상하이로 가는 길에 객사하지 않고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도 따뜻한 차를 건네는 주위 사람들과, 몸을 덥히라고 돼지를 빌려준 할아버지, 그리고 노를 젓지도 못하는 허삼관을 배에 태워주고 자신들의 피까지 팔아주는 래희 래순 형제들과 같은 사람들 덕분이다. 허삼과의 삶이 고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비극적으로만 느껴지지 않고 웃음이 존재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함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허삼관 매혈기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한 가장의 처절한 인생기록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회에 가려졌던 비극을 들춰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허삼관 매혈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를 계속 비교하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공간에는 또 다른 이의 매혈기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람의 매혈기에는 이 비극적인 삶에 희극적인 요소를 더해주는 인간적인 이웃이 등장할까? '그렇다'라고 확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고 가장 화려하게 발전하고 있는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 사회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진정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p.s. '허삼과 매혈기'는 중국의 역사를 탐구하기에도 좋은 책이다. 중국에서 가장 비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문혁 및 그 앞뒤의 역사적 사건과 그로 인해 평범한 사람들이 겪게 되는 고통을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이 책의 저자인 위화의 역사의식이 중국인 전체의 역사의식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재 문혁을 일으킨 마오쩌뚱의 초상이 가장 큰 지폐인 100위안을 장식하고 있고, 문혁 시기의 하방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과 그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혁 기간에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질문할 수 도 있지만, 만만치 않게 비극적이었던 한국 근현대사를 평가하는데도 다양한 시선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면 조금은 이해가 쉬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