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밥상
ㅡ조각보 같은 집
80년대 초등학교 다닐 땐 동네 모든 대문이 열려 있었고, 어린이들은 어느 집에든 모여서 고무줄놀이도 하고 공기놀이도 하며 놀았다. 우리 집이 동네에서 가장 컸다.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던 90년대를 지나며 집을 떠나 있다가 동네에 오면 집을 헐고 새로 짓는 이웃집이 많았다. 이층 집도 생겼고, 멋진 기와지붕도 많아졌다. 현재 동네에서 아마 우리 집이 가장 오래된 집이겠다.
우리 집을 뜯어보면 시간차를 두고 조각보처럼 이어졌다. 100년 전 세운 나무 기둥에 아직도 일부 흙벽이 남아 있다. 정부 지원의 지붕개량 사업 등으로 일부분 수선되었다. ㄷ 자 모양 집 구조에서 두 변이 모두 창고다. 대문과 가장 가까운 곳은 개방형 창고다. 문이 없다. 30년 전까지 소를 키우던 축사였다. 흙벽에, 호미며 삽, 세 발 수레, 농사용 작은 건조기까지 농사에 필요한 도구들이 가득하다. 다른 한 변은 문이 달린 창고로, 아직 ‘광’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여기 또한 쓰러져 가는 흙집이다. 쓰임이 다한 커다란 항아리에 빈 쌀포대나 자투리 덮개 천이 들어있고, 제 용도를 읽은 나무 뒤주 위에는 오래된 그릇이나 갈무리한 씨앗, 빈 상자나 신문지 같은 농사 부자재가 쌓여 있다.
나머지 한 변이 안방과 부엌이 있는 건물이다. 안방을 중심으로 한쪽은 부엌, 한쪽은 대청마루였는데, 유리문을 달아 하나로 이었다. 옛 부엌은 아궁이 높이라서 마당보다도 낮았는데 흙을 채우고 난방 보일러도 설치해서 안방과 같은 높이가 되었다. 물론 싱크대도 있고 수도도 잘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나무 서까래는 옛날 그대로이고 게다가 안방은 창호지 문 그대로다. 우리 집을 처음 방문했던 50대의 친구는 “옛날 우리 외할머니네 집 같아.”라고 말했다. 한눈에 잘 알아보았다. 100년 넘은 집 맞다. 나무 기둥이 유지되는 걸 보면 옛 목수가 허투루 짓진 않았나 보다. 집 수선은 아버지가 직접 하셨다.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 아버지 기억에 따르면, 마당만이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여름에 큰비가 내리면 흙이 쓸려 나가서 자갈이 드러나고 마당에 물이 고여 질척했었다. 물이 서서히 빠지도록 마당 한쪽에 잔디를 돗자리 넓이만큼 심으셨는데, 번지고 번성해 지금은 마당 전체가 잔디밭이다. 엄마는 마당을 지날 때면 풀을 한 포기라도 뽑는다. 호미처럼 굽은 몸을 더 굽혀 잔디와 비슷한 새포아풀을 쏙쏙 골라내 뽑으신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관리된 마당은 제법 싱싱한 풀밭의 모습이다.
버스를 타고 동네 정류장에 도착하면 언제나 아버지가 마중 나와 계신다. 하루에 4대밖에 없는 버스라서 시간도 잘 알고 계신다. 부모님의 교통수단인 사륜 오토바이로 막내딸을 태워 간다. 걸어서 5분도 안 걸리지만, 장을 봐온 가방을 실을 수 있어서 오토바이 마중이 고맙다.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하늘도 보고 냇물도 보고 그날의 바람도 느낀다. 아버지 뒤에서 오픈카(?)를 타고 동네를 지나는 건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1분만 참으면 집에 도착한다.
엄마가 가꾸어 논 마당도, 갈무리해서 아버지가 줄 맞춰 걸어둔 마늘을 볼 틈도 없이 엄마에게 “엄마, 나 왔어.” 인사만 하고 부엌으로 간다. 하루 전 서울에서 산 식재료를 냉장고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ㅡ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부엌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번 돈 다 썼나 보네.”
어제 반찬가게에서 산 찌개, 농사짓지 않는 버섯, 그리고 어묵이나 맛살 같은 가공품, 그리고 부드러운 두부, 묵 정도이지만 마음이 급하다. 음식이 상하면 안 된다는 걱정에 아이스팩 넣은 보랭 가방을 들고 오니, 몇 개 사지 않아도 가방이 크다. 2주 프로젝트 계획은 발표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보고 싶다거나 자주 오라는 이야기는 안 하시는 분들이다. 하는 일 잘하라, 하는 당부가 더 많다. 자주 온다고 하면 걱정부터 하실 거 아니까. 그리고 내가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섣불리 약속도 하지 않았다. 전화 통화할 때 “드시고 싶은 것 있어요?” 물어도 답하지 않는 부모님.
포스트잇에 음식 이름을 써 와서 냉장고에 붙여 놓고, 시작한다. 오전 10시에 도착했으니 점심에 먹을 찌개 하나 반찬 하나 하려면 마음이 바쁘다. 재료를 꺼내고 음식을 시작하면 엄마가 뭐하게, 나 할 거 있음 시켜, 하신다. “엄마 쉬셔요. 여기 앉아 계셔요.” 하며 의자에 반강제로 앉혔다. 머릿속은 조리 순서를 생각하느라 엄마 표정을 살필 여유가 없다. 하지만 곧 엄마를 찾게 된다.
“엄마, 들기름 어떤 거 써? 큰 냄비는 밖에 있나? 엄마 지난번에 당면 남았는데, 그거 어딨어요?”
짧은 시간 안에 계획을 완수하려고, 미숙한 요리 솜씨에 긴장해서 나는 엄마의 시선을 놓치고 있었다. 부엌은 엄마의 자리다. 엄마 부엌이 나에게 익숙하지 않다. 다 알 것 같았지만 엄마의 규칙을 모르는 게 많았다.
초기에 가장 자주 만든 반찬은 잡채였다. 가끔 가는 거니까 입맛 도는 음식을 해드리고 싶었다. 고은정 선생님과 음식책을 만들다가 배운 방법이었다. 엄마의 방식이 아니었다. 엄마의 부엌에서 내가 배운 음식을 하려고 하니 접점이 없었다. 나는 끓는 물과 면이 익는 시간을 재느라 시계를 보고 채소를 다듬어 씻고 채 치고 볶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엄마가 분주한 나를 어떻게 지켜보고 있는지는 몰랐다. 서울 반찬가게에서 사 온 동태탕에 두부를 썰어 넣어 끓이고, 잡채 하나 하고 나면 땀이 나고 힘이 풀렸다.
점심상을 차리고 나면 엄마가 만들어 두신 김치와 밑반찬이 더 많았다. 그래도 따뜻하게 기름이 흐르는 잡채를 맛있게 드셔서 기분이 좋았다. 몇 달 동안 다른 재료를 조합해 가며 잡채를 했다. 엄마 아빠도 좋아하시는 것 같았고, 나도 점점 익숙해졌다. 양념이 있는 자리도 알게 되고, 냄비와 큰 그릇을 꺼내 쓰는 것도 익숙해졌다. 속도도 좀 빨라졌다.
원래 엄마는 아프다고도 말하지 않는 분이다. 급체해서 참을 수 없을 때 말고는 엄마가 얼마나 아픈지 알 수가 없다. 치과도 가지 않는 고집에 이젠 병원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고, 괜찮으시냐고 묻기만 한다. 10년 전 큰언니가 암이라는 못된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는 더욱 아프다거나 병원에 가자거나 하고 먼저 말씀하시는 법이 없다. 그런 분인데, 엄마가 진짜로 원하는 밥상과 음식이 무엇인지 알아내기가 참 어려웠다. 어차피 엄마는 대답을 안 하실 거니까 내가 알아서 한다는 합리화가 깨진 건 어느 날 엄마가 지나가듯 한 말이었다.
“아버지가 청국장 먹고 싶다고 하는데, 내가 안 했어.”
청국장은 부모님께는 사서 먹는 음식이 아니다. 콩 농사를 짓기 때문에 메주콩을 씻어서 삶아서 3일 동안 띄워서 먹는 음식이었다. 청국장을 안 했다는 건 힘들어서 청국장을 띄우지 않았다는 말씀이었다. 부엌에서 아버지가 없을 때 나에게 슬쩍 흘린 말이지만 먹고 싶은 음식을 말씀하신 첫 음식이라서 기억하고 있다가 전화 통화할 때 대화 소재로 꺼냈다. 통화는 늘 스피커폰이다.
“아버지, 청국장 생각나셨어요?” (나)
“보글보글 끓여 먹으면 맛있지, 왜. 엄마가 안 한대.” (아빠)
“콩을 언제 삶게요.” (엄마)
“응. 그러셨구나.” (나)
드디어 엄마, 아빠가 먹고 싶은 음식을 한 가지 알게 되었다. 냉장고 음식을 채우기로 마음먹고 나서 가장 어려운 것은 요리보다 부모님 속마음을 알아채는 노력이었다. 뭘 해도 다 맛있다고만 하셨다. 메뉴 짜기도 어려웠다. 엄마의 부엌이 익숙해지고 나니, 그제야 엄마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어 알게 된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부엌은 엄마의 자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나 당연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엄마밥상_1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