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의 시작

나는 어른입니다. 그러나 10살입니다.

by 남다름

저기 저 멀리 놀이터 한가운데. 녹슨 그네에 앉아 발돋움을 하는 아이가 있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이었다. 아이는 발을 연신 내디뎠다. 비가 오든 해가 내리쬐든 아무렴 상관없는 듯했다. 아이는 그 비를 몽땅 맞고 집에 들어갈 생각인지 옷이 젖어가는데도 그네 타기를 멈추지 않았다.


저 멀리 또래 아이들이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따금 엄마가 아이를 데리러 온 광경도 심심찮게 지나친다. 핸드폰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으므로 공중전화가 북적였다. 무료통화를 위해 20초 남짓한 시간을 전전긍긍하며 엄마에게 제가 우산이 없다는 사실을 초조하게 알린다. 수화기를 여러 번 들었다 놓았지만 손가락은 끝내 지역번호를 누른 채로 멈추었다. 아이들의 아우성에 멀리 밀려난 아이는 그대로 비를 맞고 집 앞 놀이터로 향했다. 그 무렵 어디서 불어온 열풍인지 종합학원이 유행을 탔다. 사교육 열풍이 불어닥친 초등학교에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을 조사하는 게 더 빠른 시대의 시작이 그때였다.


친구들은 죄다 학원에 가거나 비가 와서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여전히 그네에 앉아있다. 날이 점점 어둑해지기 시작하고 몸은 으슬으슬 추워오기 시작했다. 놀이터에 딸린 정자로 달려가 비를 피하지만 여전히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깨가 축 쳐진 아이. 머리부터 발끝이 빗물에 눅눅하게 젖어 가엾어 보이기까지 한 아이를 보면 당신은 어떤 말을 건넬 것인가?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그 어린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 어린아이는 결국 자라 삐뚤어졌을까, 아니면 인생역전의 드라마처럼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을까. 그런 난잡하거나 대단한 스토리를 갖춘 영화는 없다. 여전히 그 아이는 비를 흠뻑 맞은 채로 정자에 앉아 축 늘어진 모습 그대로 마음 한 구석에 있다. 그 아이가 자라면 뭐가 될까. 정말 괴물이 되어 내 머릿속에 침투라도 할까. 아니, 그 아이는 자라기는 할까. 언젠가 자라 비를 피해 달아나기는 할까.


그 아이,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 자라고 있는 나의 외로움에 대해 나는 다시 생각한다. 너는 어떤 말이 듣고 싶었느냐고. 나는 이제 어른이 되어 어린아이인 널 이해할 수 없어 위로조차 감히 건네지 못하고 있다고. 그렇게 무수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장마는 여전히 지속된다. 구름은 잔뜩 회색빛을 머금고 푸른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그 아이는 그네에 앉아 비를 맞고 있다. 내 마음 한구석에서 영원히 자라지 않을 그 아이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쳐다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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