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란 불나방
나방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두컴컴한 밤에 나방들은 죄다 밝은 형광등 아래에 붙어 아웅다웅한다. 살기 위한 각고의 노력 이리라. 그들에게 가로등의 불빛은 어떤 의미였을까. 삶의 터전이자 구원과도 같은 손길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신규 간호사 때의 이야기를 조금 풀어보자면 병동에 하루 입퇴원은 거의 매일 간호사의 숨을 조여올 만큼 빈번한 일이었다. 주말과 새벽에는 응급실을 경유하여 병동으로 환자들이 입원을 하곤 했다. 매일매일이 같은 날의 반복이었으나 미묘하게 바쁨의 정도가 다른 수많은 날들이 모여 만들어진 병원 생활에서 내가 잊을 수 없는 일화가 몇 가지 있다. 그 일화 중 하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삼교대가 일상인 생활에서 내가 가장 최악으로 꼽는 근무는 당연하게도 나이트 근무였다. 나이트 출근은 항상 괴로웠다. 밤을 새워야 하는 부담감과 간호사 수가 적어 발생하는 체력소모는 감히 말하길 수명을 단축시키려고 작정한 근무 같았다. 하루 내지는 이틀에 한 번 걸러 응급상황이 터지는 내과 병동에서 일했던 나는 나이트 근무를 가장 기피했었다. 어떤 근무보다도 긴장의 끈을 한시라도 놓칠 수 없어서 더욱 피곤한 근무였다. 쉴 새 없이 새벽 내내 병동 복도를 오가며 카를 끌고 병실을 들어갈 때면 이따금 공포감도 들었다. 불이 다 꺼진 병실 안에서 괴생명체가 날 덮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 딴생각에 잠겨 있다 불거진 나의 상상력과의 마찰에서 생긴 공포감 등이 나이트 근무의 집중을 방해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출근을 하자마자 인계를 받은 후 카 한가득 쌓인 주사제를 돌리고 있었다. 그 시간은 인내의 시간이자 시간 단위 단위와의 싸움으로 끝도 없이 이 병실 저 병실을 누벼야 하는 시간이었다. 한참 우울해하고 있는 내 카에 환자분이 사탕을 맛 별로 여러 개를 올려두고는 저혈당이 올 때마다 먹으면서 하라고, 피곤한데 고생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병동에서 유명했던 잉꼬부부였다. 복도를 오가며 산책을 하던 부부가 카를 끌고 다니던 나와 마주칠 때면 항상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그리 잘해드린 것도 없는데 그 부부는 유난히 우리 병동을 좋아했다. 어쩔 수 없이 타 병동으로 이실을 가던 날에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한두 달 뒤 재입원을 해서 다시 우리 병동으로 입원한 부부는 참으로 좋아했다. 내 손을 덥석 잡고 다시 와서 너무 좋다고 반갑다고 했다. 그러나 환자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 잉꼬부부가 병동 복도를 오가며 산책하는 모습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사실이 되었다. 환자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복수를 3L씩 매일같이 빼어내도 다음날이면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올랐다. 피검사 수치는 당연히 들쑥날쑥 이었고 피부는 점점 더 녹빛으로 그을어갔다. 침상에서 뒤척이는 것조차 힘겨워했으며 통증 호소의 간격은 점점 더 짧아졌다. 처방 난 마약을 주사하러 환자의 자리로 가면 그 고통의 몸부림 속에서도 환자와 보호자는 늘 내게 농담을 한 번씩 던지곤 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아주 잠깐이었다. 의식은 점차 처지기 시작했고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며칠 뒤, 환자가 처치실로 나왔다. 불분명한 의식 속 환자는 계속해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자식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아들이 오기 전 환자는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주치의가 사멍선언을 할 때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사망 선언과 동시에 가족들이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고, 모두가 환자에게 고마웠다 얘기한다. 나는 끝내 의료인으로서의 자세를 지키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고야 말았다. 그 자리를 뒤로 하고 주사실로 달려가 눈물을 펑펑 흘렸다. 목놓아 우는 보호자들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왜 이렇게 빨리 가냐, 뭐에 그리 쫓겨 벌써 가버리느냐, 아들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고 가지.
원망 어린 통곡의 소리가 병동에 메아리쳤다. 그 원망은 누구를 겨냥한 것일까. 신일까, 아니면 병이라는 몽마였을까. 화살의 끝은 어디에 가 박힌 걸까. 문득 떠올린다. 결국 그 화살은 빙빙 돌아 남겨진 가족의 가슴 한편에 큰 멍울이 진 채 무뎌졌던 가슴을 한 번씩 콕콕 찌르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 앞에 누가 잘났고, 누가 못났음을 분별할 수 있을까. 그 모두 헛된 일이라는 것을 병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부로 체감하게 되었다. 나는 그 뒤로 이틀을 우울해했다. 완벽한 타인인 나조차도 깊은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가족의 입장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음이다.
불행이란 불나방, 이제 막 신규 간호사였던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주 착한 사람만을 골라 들러붙는 것처럼 보였다. 그 착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거절이란 걸 할 줄 몰라서였을까. 어째서 그 사람이 그런 어린 나이에, 어째서 그 사람이 벌써, 왜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이 뿜어내는 아름다운 불빛에 이끌린 불나방이 들러붙은 것이리라.
엄마는 여섯 남매 중 셋째였다. 나는 살면서 엄마처럼 선하고 정직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따금 내가 나 자신에게 화가 날 정도로 충실한 소심한 정직함은 바로 엄마에게서 비롯된 것이리라. 엄마는 남매들 중 막내 이모와 가장 절친했고 서로를 믿고 의지헀다. 둘은 아주 닮았고, 이름도 비슷했다. 한 때 이모와 같은 동네에 살았을 적에는 이모의 제자들이 엄마를 보고 선생님으로 착각할 정도로 둘은 꼭 쌍둥이처럼 서로를 닮았다. 어려서뿐만이 아닌 지금 나의 엄마가 된 뒤에도 둘은 아주 애틋한 우애를 자랑한다. 나는 엄마와 이모의 애틋함을 늘 부러워했고 엄마에게 항상 나도 자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우성을 치곤 했었다. 그만큼 선자매의 우정은 아주 이상적이었다.
엄마의 인생에 있어 불행은 참 여러모로 숱하게 여린 엄마를 건드리고 지나갔다. 그 시절 부유했던 과수원 집의 딸내미로 태어난 엄마는 계절 과일을 먹으며 유복하게 자랐다고 했다. 도시락을 싸가면 엄마의 도시락은 어깨가 하늘로 치솟을 만큼 가득 차 있었고 친구들이 죄다 엄마의 과일을 호시탐탐 노렸다고 했다. 엄마의 옛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엄마는 꽤 유복하고 좋은 집에서 착한 딸로 자랐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랬다. 집이 갑작스레 어려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큰 외삼촌의 무리한 사업 확장은 독이 되어 집안 형편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엄마는 상고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고, 어려서부터 똑 부러졌던 막내 이모와 공부밖에 모르던 막내 삼촌에게 진학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때의 엄마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렸어야 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막내 이모는 멋쟁이였다. 학교 선생님인 막내 이모는 현명했고 곧잘 잘잘못을 따질 줄도 아는 언변가였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이모는 날 참 예뻐했다. 이모가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모가 결혼을 한 뒤에는 이모의 사랑이 예전만 하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어린 나는 섭섭하기만 했다. 선생님인 이모가 화가 나면 나는 꼭 학교에 온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이모가 결혼을 한 뒤에 한동안 나는 이모를 무서워했던 것 같다.
색안경을 쓴 멋쟁이 이모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이모와 곧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세련되게 입고 다녔다. 이모는 맛집에서부터 피부관리, 맛있는 커피, 멋진 그릇들 등등을 잘 알았다. 엄마와는 다르게 남에게 따질 줄도 아는 강단도 있었다. 내 부모님이 이혼을 했을 때도 이모는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하게 삶을 이어나가는 엄마와 달리 남이 된 아빠에게 화를 냈었다. 아주 터프하고 날 것 그대로의 분노였다. 그렇게 멋진 이모도 결국 행복한 결혼 생활을 끝까지 이어나가지 못했다. 결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모는 자식 없이 그 남자와 이별을 했다.
엄마와 닮은 이모는 엄마와 달리 욕심이 있었다. 승진을 위해 엄마와 멀찍이 떨어진 지역까지 나가 몇 년을 살았다. 자주 나와 엄마에게 놀러 오라고 했지만 차편도 좋지 않은 이모의 동네에 놀러 가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갑자기 이모에게 찾아온 병이 아니었다면 이모는 어린 나이에 교감으로 승진을 하고도 남았을 사람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아무 이유 없이 방에 들어가 누워있기만 했다. 어려서부터 눈칫밥을 먹고 자란 내가 그걸 모를 리 없었기에 엄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물었다. 엄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이모가 아프대. 어디가? ...... 나는 그 적막에 불안했다. 엄마가 암이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울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색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는 결국 이모가 수술장에서 나와 비좁은 스트레쳐 카에 몸을 싣고 비몽사몽 하는 걸 보고서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이모!! 이모 괜찮아? 물어보는 내 물음에 이모는 그 순간에도 조카가 왔다고 피곤한데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 이후 이모는 꾸준하게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 탓에 풍성하고 튼튼했던 머리카락이 모조리 빠져 가발을 맞췄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해 들었다. 나는 그 시기에 병원일로 한참 지쳐있던 터라 이모를 만나러 자주 가지 못했다. 1년 만에 만난 이모의 수척해진 얼굴과 가느다래진 머리칼을 보고 그래선 안되었음을 깨닫고야 말았다. 그 힘들었던 시기에 혼자인 이모 옆을 든든하게 지켜줬어야 했음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거다. 오랜만이라고 좋아하는 이모가 자주 봤으면 좋겠다고 내 팔에 착 달라붙던 이모가 어울리지 않게 병원에서 헤매는 모습을 보았을 때, 똑똑한 이모가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항상 멋쟁이던 나의 이모에게 언제든 이모의 편을 들어줄 든든한 친구가 필요했음을. 나는 미처 몰랐다. 항상 멋졌던 이모의 모습만 떠올렸던 내 오만함이었다. 이모는 강하니까 혼자서 잘 살 거야,라고 생각했던 나의 변명이었다.
모든 치료가 끝난 줄 알았던 이모의 건강검진에서 담낭벽이 두꺼워졌다는 말을 교수님께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절망했다. 어째서 이모에게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는지 세상이 통탄스러워졌다. 신이 있다면 손가락질을 하며 모욕하고 싶어 졌다. 이모는 매년마다 벽이 더 두꺼워졌는지를 정기검진을 통해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복부초음파 검진 결과를 엄마에게 전했을 때 엄마의 표정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모든 불행이 이모에게로 흘러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나 또한 그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 같아 슬퍼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시간이 너무 협소해 서글펐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불행을 걷어내 줄 수 없는 현실에 무기력해졌다. 엄마 제가 커서 효도할게요. 그 말을 결코 지킬 수 없어서.
우리 이모. 여전히 멋진 이모에게 불나방들이 꼬이거든 훠이훠이 손을 휘저어 내쫓아주고 싶다. 파리채든 잠자리채든 내가 쥐어 잡고 불나방을 잡기 위해 가로등의 불빛 아래를 달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될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이모에게 내가 든든한 자매가 되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