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입장도 이해가 돼요."
"다 이해한다. 너를"
우린 이해라는 단어를 남발하고 있다. 한반도 바깥의 칠십억 인구의 세계에서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천만 지성의 합집합인 대한민국에선 그렇다.
'이해한다.' 라는 말은 건방지다. 온전히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것. 내가 곧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되는 것은 지구 행성과 우주의 진리를 깨우치는, 필시 예로부터 내려온 구도의 길 끝에서나 이루어질 어려운 일임에도 우리는 감히 그것을 행하고 있다고 장담해 버리는 것이다.
'이해한다.' 한 마디는 위험하다. "내가 너의 생각을 알고, 행동을 예측하고 그래서 나는 너를 측은히 여기고 있으니 나를 믿고 의지하지 않겠니? 나를 너와 동일시해도 좋단다."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여야 한다.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고, 나 또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세계의 귀퉁이에서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을 뿐인 나는 카운터 너머에서 커피를 내리는 카페 직원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역시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주말마다 백색의 노트북을 가지고 구석 자리에 앉아 온갖 표정을 지으며 키보드를 두드려대는 수상자를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이해해야 할 이유가 어딨는가?
심지어 나의 부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늦은 밤에 '이해'라는 단어를 곰곰이 돌아보는 것이다.
'이해'라는 단어는 너무 많은 용법으로 남용되고 있지만, 허용해야 할 용법은 단 한 가지다.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어.'
굳이 이름 붙이자면 [불가능 자동사]로써 '이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한다.
그리하여 나는 '몰이해'를 전제로 당신에게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해'라는 단어는 '몰이해'의 준말인지 모른다.
어쩌면 '이해'라는 단어에 숨은 뜻은 '몰이해'여야 할지 모른다.
'너를 이해해'라는 말보다
'이해 못 해줘 미안해'라는 말이 더 포근하게 들리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