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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념 Jul 24. 2023

단순

창밖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지만 어김없이 운동장으로 향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달리다 보면 숨이 가빠진다. 앉아 쉬고 싶은 마음을 다잡고 몸을 가누는 데 심력을 쏟는다. 오로지 다리를 움직이는 것에만 몰두한다.

그 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때도 머릿속을 간지럽히던 고민 걱정이 잠시나마 사라진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건 의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일과 시간 대부분을 키보드와 씨름하다 보니 만성적인 운동부족에 시달렸고 잔병치레를 반복하다 결국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처방 대신 운동을 권하며 매일 3km를 달릴 때 기대할 수 있는 효과들을 읊었다.

체지방감소, 하체근육 강화, 활력 증진, 혈액순환 개선, 노폐물 배출...

내겐 크게 와닿지 않는 이점들이었지만 어찌 됐든 몸이 축났으니 컨디션이 회복될 때까지는 달려보자 하는 마음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달리기가 오늘로 100일 째다. 석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달렸다. 심지어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도 그랬다.


100일을 달릴 수 있었던 건, 의사의 권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일주일 만에 온몸에 활력이 도는 것을 체감했지만 내가 느낀 가장 좋은 효능은 체력향상이 아닌 '달리는 동안 나 스스로가 한없이 단순해지는 경험'이었다.


지난해 12월,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해 보겠다 마음먹었다. 자격증을 공부했고 선망하던 분야로의 이직을 준비했다. 하지만 재취업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급한 대로 프리랜서로 밥벌이를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조급증이 심해졌다.

'오늘은 책을 많이 못 읽었네'

'쓰던 글을 마무리 못 했네'

'앞으로 뭐 하지?'

'내가 오늘 열심히 했던가?'

'프리랜서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

온종일 머릿속을 맴돌던 걱정 고민이 최악의 형태로 꿈이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날까 봐 잠자리에 드는 것도 무서웠다.


그런 와중에 병원을 찾았고, 처방전 대신 운동을 권유받은 나는 잠시나마 걱정에서 해방되는 길을 알게 된 것이다. 쉬지 못했던 마음이 달림으로써 쉴 수 있게 됐고 스스로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여유를 만끽하며 생각했고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단순하게 살자'


그동안 너무 복잡하게 살았다. 앞서 언급한 고민들을 끌어안은 채 지냈다.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걱정하며 스스로 채찍질해 왔음을 깨달았다.

물론 현실적인 고민이고 마냥 피하기만 해선 안 되는 고민들이지만, 그것이 과하면 해결은커녕 괴로울 뿐임을 깨달았다.

'하루 24시간 중 자는 시간을 제외한 16시간을 최대한 생산적인 활동에 쓰겠다' 다짐한 결심이 그리 중요치 않다는 걸 깨달았고

키보드와 씨름하는 시간만큼 여유를 가지는 게 중요함을 깨달았다.


돌아보면 제대로 쉬었던 기억이 없다. 2014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시작한 사회생활. 9년이 지난 2022년 12월에 쉼표를 찍었다 생각했지만 사실 제대로 된 쉼은 없었던 것이다. 2023년 7월, 비로소 쉬는 법을 익혔고 성인이 되고 맞은 첫 방학을 만끽하는 중이다.


앞으로도 계속 달리며 쉴 것이다. 달리는 동안 난 단순해진다. 더는 달릴 수 없을 때까지 달리고, 달리고 나면 쉰다. 힘겹게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느새 다시 달릴 힘이 회복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면 다시, 달릴 준비를 한다. 또다시, 키보드를 괴롭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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