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한밤중에 거대한 물체가 공중에서 떨어진 소리 같았다. 어머니의 놀란 목소리가 잠결에 어렴풋이 들렸다. 작은방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던 나는 본능적으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달빛사이로 키 큰 감나무의 긴 그림자가 마당에 드리워지고 가을바람에 서걱대는 댓잎이 슬피 울어댔다. 귀뚜라미 우는소리만 가끔 들릴 뿐 사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밝은 달빛에 드러난 댓돌 아래에는 반쯤 엎드려진 채 야위고 초라한 모습의 주인공은 바로 아버지였다. 그 옆에는 낯모르는 웬 남자가 말쑥한 양복을 입은 채 아버지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근처에 사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땅바닥에 기울어진 채 비스듬히 앉아 일어나지 못한 아버지, 지치고 파리한 얼굴로 고개 숙이고 있는 남자, 그 옆에 놀란 표정의 어머니가 서있다. 잠옷차림으로 뛰어나온 나는 가을밤 찬 기온에 온몸이 오돌오돌 떨렸다. 낯선 남자를 바라보고 있던 어머니가
“아닌 밤중에 무슨 일이요?”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미안한지 목례를 하며 어디 다친 곳 없냐며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려했다. 재차 무슨 일이냐는 어머니의 다그치는 질문에 안절부절 못한 남자는 입을 열었다.
“깊은 밤에 불청객으로 갑자기 찾아와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 마을에 사는 바우씨 조카사위 되는, 제주도에 사는 사람입니다. 처가를 찾아가는 중인데 밤중에 두 시간 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못 찾고 도움을 구하려고 마을에 내려와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주인양반을 불렀습니다.”
“그라믄 잠잘 집을 찾아서 우리 집으로 오셨오?”
“아닙니다. 초행길이라 물어서 처가를 찾아가야 되는데 한밤중에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 데리고 온 네 살짜리 아들이 다리아파서 더 이상 못 걷기에 염치 불구하고 늦은 시간에 무례한줄 알면서도 처가를 찾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남자의 손에는 1.8리터짜리 소주 한 병과 선물 꾸러미가 들려있다. 지금 몇 시 쯤 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남자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새벽 두시라고 말하면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시골의 가을은 곡식을 거둬들이는 수확의 기쁨과 함께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고 일끝나면 저녁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곤한 잠에 빠져든다. 아버지는 낮에 밭에서 보리갈이 일을 끝낸 피곤한 몸이라 저녁식사 마치자 초저녁부터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문밖에서 부르는 낯선 사람의 출현에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내려가다가 잠결에 발을 헛디뎌 방문 앞 툇마루에서 굴러 마당으로 그대로 떨어졌다. 마당은 툇마루에서도 돌계단을 대여섯 계단을 내려가야 되는 높이라서 넘어지는 소리도 요란했다. 아버지는 얼른 얼어나지 못 하고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다행히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남자는 제주도에서 처가 옆에서 살았단다. 장인이 고향으로 이사한 후로 처가를 처음 방문하는 길이었다. 그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들 통행이 없는 이미 늦은 밤12시였다. 장인이 마을 저수지 너머 산골짜기에 산다는 것만 알고 집을 찾으려고 저수지를 따라서 산속으로 아무리 들어가도 민가는 없고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길을 잘못 든 게 아닌가 싶어 마을로 다시 내려왔다가 또 산속으로 올라가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마을에 발길이 닿았을때는 불빛이있는 집이 보였다, 두 시간 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다시 마을로 내려 왔을때는 고요한 적막 강산 이었다. 지나가던 길옆에 불켜진 집도 찾을수 없다. 산골짜기를 헤매다가 지치자 아버지와 아들은 저수지 둑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주병을 뜯어서 소주를 마시고 맥이 풀리자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눈앞에 펼쳐진 잔잔한 저수지물은 부드러운 리듬이 흐르는 선율처럼 평화롭기만 한데 달빛에 어리는 두 그림자는 처량하기만 했다. 산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보이지 않은 집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방향을 찾지 못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산속에서 외롭게 들려오는 부엉이 우는 소리는 자신의 애닮은 마음을 대신한 것 같이 섧게 울어댔다.
"나는 괜찮으니까 아버지 울지 마세요. 여기 있을 테니까 아버지 혼자 집 찾아가서 나중에 나 데리러오세요.” 걷기가 버거운지 아이답지 않게 말하는 아들의 한마디 위로에 힘입어 용기를 내서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우선 눈에 보이는 대로 찾아 들어온 집이 늦게까지 불켜진 외딴집인 우리 집은 이미 불이꺼져 있었다. 아이는 지금어디 있냐고 어머니가 묻자 그는 큰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무섭지도 않은지 집 바깥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아버지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마당으로 걸어왔다. 눈이 초롱초롱한 아이는
아주 똘똘하게 생겼다. 아이와 함께 밤새 산골짜기를 헤맸던 그의 딱한 사정을 들어보니 탓할 상황이 아니라 도와줘야 될 처지였다.
아버지는 남자에게 걱정 말라며 우리가 데려다 줄 테니 따라오라고 하면서 앞장섰다. 어머니는 아이를 등에 업고 아버지와 남자 넷이서 달빛을 등에 지고 늦가을 찬바람을 가르며 바우아저씨 집으로 올라갔다
마당에서 낯선 사람의 부르는 소리에 놀란 아버지가 방에서 나오다가 툇마루에서 발을 헛디뎌 갑자기 몇 바퀴 굴러 떨어진 모습을 본 그는 아버지가 큰 부상을 당한 것 같아 겁이 벌컥 났다. 가지고온 술과 선물 꾸러미를 버리고 도망가려고 했단다.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다 잡히면 꼼짝없이 도둑으로 몰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얻어맞을 각오로 그 자리에 있었다고 당시의 절박했던 심정을 그는 길을 가면서 그렇게 털어놨다.
바우아저씨는 오래전부터 산골짜기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산중생활을 했다. 구르지 않은 수레바퀴처럼 그날이 그날인 곤고한 그의 생활은 오래도록 산중생활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그의 형도 1년 전에 동생이 사는 곳에서 1Km쯤 떨어진 더 깊은 산골로 이사한 후에 산골 밭에서 나오는 작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가며 사는 형편이었다. 남자의 장인은 산속으로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마을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그의 동생 바우아저씨는 오랜 산중생활로 마을사람들이 거의 알고 있었다.
우체부는 자전거가 올라 갈수 없는 험한 산골짜기에 있는 집들의 편지는 우리 집에다 맡겨 놓았다. 그들은 마을에 내려오면 우리 집에 와서 편지를 찾아가곤 했다. 우리 집이 편지 배달의 중간 역할을 했던 셈이다.
남자의 처가까지 가는 길은 험하고 먼 산길이라서 처 작은아버지인 바우아저씨 집으로 갔다. 여러 차례 불러도 그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산중에 사는 사람을 한밤중에 불러대니 중대한 일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무서워서 선뜻 나오지 못했다며 놀란 모습으로 방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조카사위가 밤길을 헤매고 있기에 데려왔다고 하고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곧 바로 집으로 내려 오셨다.
그 후 아버지는 남자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밤길을 헤매는 자신에게 베푼 사랑에 고맙다는 편지와 함께 제주도에서 처가 장인을 통해서 감귤나무 한그루를 선물로 우리 집에 보내왔다. 귤나무는 반세기 가까이 우리 집 대문 옆에 서서 보호수 역할을 했다. 푸른 잎이 무성하던 귤나무도 삶의 유효기간이 다 됐는지 잎이 버석거리며 말라가고 있다. 세상 떠난 어머니와 아버지가 안 계신 고향집 마당 한쪽에서 긴 세월을 견디며 외롭게 서있다. 귤나무를 볼 때마다 밤중에 산골짜기를 헤매다 집을 찾아온 지치고 파리한 얼굴의 산골짜기를 헤매던 나그네와 그의 아들은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아련하게 떠오른 그들의 옛 모습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