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흩어진 낙엽은 천연색이다. 노란 은행잎 속에 빨간 단풍잎이 어우러져 떨어진 자리에 듬성듬성 푸른색 수를 놓은 듯 색깔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다. 가만히 있어도 떨어질 운명인데 세차게 부는 바람에 몸살을 앓은 나무가 미처 물들지 않은 잎사귀를 바람은 회초리를 쳐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은행나무는 풍성하게 달았던 잎을 노랗게 물들여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더니 나목이 되어 초라한 모습이다.
얼마 전 J를 만났다. 얼굴은 부은 것처럼 부풀어있고 머리카락은 자라던 곳을 떠나버려 둥글둥글한 두상이 마치 수도하는 여승을 연상케 했다. 말끔히 쳐다 보는 내게 “언니, 그냥 감추고 말 것 없이 노출시키니까 편해, 세수하기도 좋고 따로 머리감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마음 편하네.”
그녀가 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같이 산에 오르며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을 토해내듯 자기에게 불어 닥친 과거의 운명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렸던 지난날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시간의 캡슐 속에 묻어두었던 과거가 캡슐껍질을 깨트리고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잊힌 사람이라고 담담히 말하던 그녀는 한때 남편과 젊음을 같이했던 과거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남편은 다분히 바람기 많은 남자였다. 그는 여자들과 염문이 잦아들지 않고 늘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녀는 남편을 어떻게 해서라도 충실한 가장으로 아이들에게만은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가정을 지키게 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스쳐가듯 지나가는 작은 바람도 무척 신경 쓰였다. 여자의 직감은 정확했다. 남편의 뒤를 밟았다. 어두컴컴한 다방한쪽에서 다정한 눈빛으로 서로 바라보며 애정행각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바로 난리가 났다. 찻잔이 깨어지고 두 여자가 뒹굴며 싸우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남편과 다방마담이 겨우 뜯어말려 싸움은 끝이 났지만 매번 여자문제로 속을 썩이는 남편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남의 영업장에서 난리 쳐서 미안한 생각이 들어 다음날 다방을 찾았다. 다방마담에게 사과하고 피해보상을 하고 나오려는데 잠시 차 한 잔 하고 가라며 마담이 그녀를 붙잡았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은 괘씸하고 억울하지만 남자들은 잠깐 지나가는 바람으로 한두 번 실수는 있는 법이니까 그래도 남편을 용서하라며 그녀를 설득했다. 잠깐 참으면 해결될 문제를 홧김에 이혼하면 경제적 어려움과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며 그녀를 위로했다. 우리 사회가 이혼에 대한 안 좋은 시선과 불편하게 살아가야 하는 사회구조는 여자에게 이혼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현실은 견디기 힘든 시선이 따라다닌다며 그녀와 아무 관계없는 다방마담의 위로를 받고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분통이 터지면 곧바로 헤어질 거라며 씩씩거리다가도 며칠 지나면 들끓던 분노가 사라져 버리면 유야무야 그냥 지나가 버리기 일쑤였다.
잔잔하던 바람은 잊을만하면 다시금 불어왔다. 인내에 한계를 느낀 그녀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선을 넘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끊임없이 부는 바람 앞에 그녀도 지쳐갔다. 끈질기게 요구하는 아내의 이혼요구를 벼랑 끝에 서자 어쩔 수 없이 받아주었다.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살아온 과거를 뒤로 하고 남편과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남편을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속이 후련했다. 모든 것을 털어버리니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어느 날 그녀는 내게 암수술을 한다는 말을 남기고 병원에 입원했다.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가진가 했더니 그녀 주변에서 다시금 불어오는 바람은 조용히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 앞에 불어오는 폭풍은 그녀를 날려버릴 기세로 세차게 불어왔다. 겨우 잔잔하다 싶었는데 인생을 통째로 삼킬 것 같은 바람 앞에 몸을 웅크렸다.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나가고 머리는 민둥산이 되었다. 바람이 스쳐도 흩날리는 머리털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민머리를 모자도 착용하지 않고 그대로 다녔다.
“얼굴이 예쁘니 머리카락 없어도 여전히 예쁘네. 머리카락 자라 나와도 그냥 밀어버리고 민머리로 다니는 게 더 예쁘겠다.”
나의 농담에 웃기만 했다.그녀는 인생의 가을을 지나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있다. 나뭇잎은 겨울의 혹한을 견뎌내기 위해 몸의 영양을 축적하는 방법으로 가지에 달린 나뭇잎을 떨어낸다. 엄동설한을 견디어 내면 봄에 새로 잎을 달기 위해 추운 겨울에 벌거벗은 몸으로 서 있다가 봄을 맞는다. J도 살아남기 위해 항암치료를 하는 바람에 부작용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희생되었다. 남편과의 이혼이 불필요한 짐을 정리하는 마냥 홀가분한 심정은 아니었으리라. 가정을 두고 이혼이라는 벼랑 끝에 섰던 남편도 정신적으로 힘들었는지 초라한 모습으로 딸의 결혼식에 나타났다. 술로 세월을 보내며 이미 건강을 상실했던 남편은 얼굴에 병색이 짙었다. 어쩌다 남편과 바람난 상대였던 여자는 남의 가정을 파탄 내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병든 남자대신 가장의 역할을 해 나가며 힘들게 산다는 소문을 바람결에 들었다. 이혼 전 남의 가정 파탄 낸 여자라며 홧김에 육탄전까지 벌이며 싸웠던 일이 생각났다. 가정에 크고 작은 바람을 일으키던 남편은 어느 날 바람처럼 세상을 떠나버렸다. 더 이상 남편과 엮이기 싫다던 그녀도 남편의 마지막을 외면할 수 없었다. 눈 내리는 겨울날 남자는 함박꽃처럼 쏟아지는 눈 속으로 홀연히 떠나버렸다. 가슴에 남은 건 분노만이 아니었다. 그리움이 타고 남은 잔재처럼 가슴에 후회와 눈물이 스며들었다.
장례식에 딸들을 보내 남편 동거녀의 마지막 짐을 덜어주었다. 한때 미움의 감정 때문에 상대여성이 증오의 대상이 되었지만 떠밀리듯 오는 남자를 외면하지 못하고 묵묵히 마지막을 함께한 남편의 여자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며 위로해 주었다.
J도 스스로 선택한 이혼이지만 한때 분노에 가득 찬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본인이 선택한 운명 속에 이혼이라는 단어가 옭아매는 스트레스가 컸다. 가정이 해체되면서 영원히 떠난 남편에 대한 애증의 관계도 완전히 끝났다. 그녀에게 찾아온 질병은 누구와도 나눠질 수 없는 두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이었다. 남편에게서 쉼 없이 불어오던 바람은 방향을 바꾸어 지나갔지만 그녀의 삶은 더 큰 찬바람을 맞고 서 있다. 나목처럼 맨몸으로 엄동설한을 견뎌내는 그녀에게 휘몰아치는 인생의 바람이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란다. 노랗게 물든 예쁜 잎을 떨궈 낸 묵묵히 서있는 벌거벗은 은행나무가 머리카락 한 올 없는 J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나비처럼 떨어지는 은행잎을 가을바람이 몰고 간다. 바람은 상처받은 과거의 미련을 남기고 겨울을 몰고 문턱 앞에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