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굳은 표정으로 걸어온 남자는 옥자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2인실 침대에 누운 옥자 할머니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흔들어 깨우려 하자 남자는 손을 내저었다. 자는 할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던 남자는 뚜벅뚜벅 문을 나섰다. 아들에게 잘 가시라는 인사말을 하는 요양보호사 말을들은 옥자 할머니는 남자가 나간 다음 슬며시 눈을 떴다. 자는 줄 알았던 할머니에게 “방금 전에 다녀간 분이 있는데 지금 아직 1층에 있으니 다시 오라 할까요?” 묻자 고개를 저었다. 누가 다녀갔는지 아냐고 물었더니 큰아들이라고 했다.
아들 되는 남자도 나이가 70대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요양비를 요양원에 내러 올 때마다 어머니 앞에서 긴 한숨을 쉬며 얼굴만 바라보다가 쓱 가버린다. 아파트 경비로 벌어들인 수입으로는 생활비와 98세 되는 노모의 요양비를 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는 혼자 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서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 때문에 가정불화도 여러 차례 겪은 듯 노모 앞에서 땅이 꺼질 듯 내쉬는 한숨을 쉬는 모습은 그가 평탄치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바라보는 요양보호사들이 불안할 정도이다.
옛날 같으면 자식들의 부양을 받으며 지내는 노인들이 요양보험 제도가 생기면서 요양원으로 들어오고, 집에서 가족의 얼굴을 보면서 지내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환자를 사이에 두고 가족 간에 아귀다툼을 벌이는 일은 거의 없다. 편리함을 추구하려면 경제적 대가를 치러야 되지만 그것마저도 허용되지 않은 집들이 간혹 있다. 옥자 할머니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 아예 죽은 척한다. 아들이 나간 것을 확인하면 또랑또랑 눈을 뜬다.
“어르신 아들 이름 알아요?”
“경수”
“아들 집으로 가실 거예요?”
“집에는 안 갈 거야.”
비록 치매로 현실파악을 못해도 사람에게서 느끼는 감정까지 모르진 않는다. 언젠가 할머니가 몸이 아프다는 전화를 받고 요양원으로 한걸음에 달려온 아들은 기운 없이 자리에 누운 노모를 보며
“아직도 살아계시네요.”라는 말을 했다며 요양보호사 들은 그를 기피인물로 꼽았다. 얼떨결에 한 말이었지만 사람의 생명을 놓고 경제적인 문제로 가볍게 말하는 아들의 모습에 할머니는 아들이 보고 싶은 그리운 사람은 아니었다.
옥자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들어오기 전에 혼자 살면서 폐지를 주어서 팔아서 겨우 연명하다가 더 이상 활동 할 수 없자 큰 아들에 집에서 지내다가 요양원으로 들어왔다. 슬하에 딸도 있지만 딸이 찾아온 것을 보지 못했다. 아들 집으러 갈 거냐는 물음에 상당한 거부반응을 나타낸다. 아들과 같이 살면서 좋은 기억은 없었던 것 같았다. 천륜으로 맺어진 부모자식 이지만 오히려 서로 안보고 사는 삶이 결핍된 가족간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 보다는 독립된 공간에 있는것이 마음 편해 보인다.
옆 침대 금희 할머니의 자녀들은 올 때마다 간식을 사 와서 옥자 할머니까지 챙긴다. 금희 할머니 딸들이 오면 자다가도 눈을 뜨고 “오셨어요?” 인사를 한다. 비록 남이지만 자기를 챙겨주는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런 그가 유독 아들만 오면 눈을 감고 세상모르고 잔 척하다가 아들이 간 것을 확인하면 눈이 말똥말똥 해진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끊어지지 않은 생명을 놓고 긴 한숨을 쉬는 큰 아들이나 아예 얼굴도 내밀지 않은 작은 아들,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신 것을 알면서도 찾아오지 않은 딸, 세상은 참 각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할 것 같은 젊음도 세월이 가면 노인의 자리로 밀려갈 것이고 때가 되면 자기의 본향으로 되돌아간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삶의 끝자락에서 그토록 고달픈 생의 끈을 쥐고 있던 옥자 할머니도 육신을 벗고 본향을 향했다. 아들의 두 어깨위에 놓인 무거운 짐을 덜어주기 위해선지 구원이 되지 못한 세상의 미련을 뒤로 하고 드디어 세상 짐을 벗었다.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당신의 영원한 나라를 향해 먼 길을 편안히 떠난 할머니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