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문을 살며시 열면서 할머니는 구부정한 모습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동이할아버지 침대로 다가갔다. 하루도 빼지 않고 병실을 찾아온다. 다리가 아파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해서 날마다 콜택시를 불러서 병원을 오간다.
노부부가 둘이 살다가 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자 할머니 생활의 근거지가 병원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오른손에는 돌돌 말린 한지가 들려져 있다. 할아버지 눈앞에 한지를 펼치자 먹을 갈아서 두루마리에 쓴 한문 붓글씨가 펼쳐졌다. 발병하기 전에 취미생활로 붓글씨를 썼는데 보관해 뒀던 글을 가져와 할아버지 눈앞에 펼쳐 보이지만 할아버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께서 활동적으로 취미생활 하던 때를 기억하면 혹시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집에 보관하고 있는 소지품이나 추억이 될 만한 물품들을 가져온다. 인생의 마지막을 둘이서 오롯이 살고 싶은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며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와서는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사업한다며 집을 나선 후 몇 년을 소식 없이 지냈다. 할머니 혼자서 아들 오 형제를 키울 때 삯바느질로 가계를 이끌어나갔다. 명절에는 혹시나 집에 오시려나 하고 마루 끝에 아침까지 불 밝혀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수없이 기다렸다며 힘들었던 삶의 여정을 회고했다.
유난히 머리가 명석한 아들들은 학교에서 학년 초에 꼭 반장을 맡아 와도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반을 위해서 떳떳하게 빗자루 하나라도 사주기 어려운 형편이라 반장 맡아오지 마라고 부탁해도 아들들은 힘든 어머니 신경 쓰지 않게 한다며 학급 임원을 하면서도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알아주는 고운 심성을 가졌다. 한 땀 한 땀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고운 한복을 보면서 남편의 소식을 기다린 지 몇 년이 지나자 집시처럼 떠돌던 남편은 한밤중에 커다란 가방 하나 메고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원망이나 탓을 하기보다는 빈손으로 왔지만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반가웠다.
이산가족으로 살아오던 가족이 한 상에서 밥 먹는 것도 커다란 축복이란 걸 그때 알았다며 남편의 부재중에도 잘 자란 아들들을 보며 남편은 미안해하면서 죽을 먹어도 돈 벌기 위해서 가족을 떠나지 않겠다며 아내의 손을 잡아준 남편이 고마웠다.
아들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서울대학에 들어가서 과외를 해서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거나 장학금을 받아서 해결했다. 5형제가 의사 교수 회계사등 전문 직종에 종사하고 있어서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데 할아버지의 와병으로 다시 이산가족이 됐다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할 인생의 황금기인데 병으로 누워있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본다. 할아버지 병 나아서 퇴원해서 집에서 2년만 같이 살다가 돌아가셔도 원이 없다며 오전에 와서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침대 옆자리를 지키고 있다.
옆 침대 K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더니 눈을 흘긴다. 제대로 말은 할 수 없고 의사 표현을 한다고 할머니를 향해서 “가, 가” 한다. 보기 싫으니 집으로 가라는 뜻이다. 뇌졸중에 폐암, 치매까지 동반된 병은 3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차도가 없다. 가족들도 지쳤는지 오지 않는다. 치매가 있어도 기본적인 생각이나 감성은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가족은 오지 않고 동이 할아버지 할머니는 하루도 건너지 않고 종일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걸 보고 약이 오른 모양이다. 갑자기 침대 난간을 잡더니 바닥으로 떨어지겠다고 다리를 침대 난간에 걸쳤다.
병원 생활에 이골이 난 환자들은 치료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K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집에 가겠다고 하다가 할머니가 오면서부터 정도가 더욱 심해진 것 같다.
동이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간 다음 열이 나기 시작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침이 되자 연락받은 할머니가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오셨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할아버지를 흔들며 귓속에 무슨 말을 계속했다. 빨리 회복하라는 말 같았다. 저녁에 아들들이 병실로 오고 마지막으로 정형외과 의사인 막내아들이 와서 할아버지의 상태를 보더니 돌아가실 정도는 아니라며 걱정하지 말고 집에 가서 쉬라고 형들에게 말했다. 기관지 절개한 목에서는 가래 때문에 석션을 해서 불순물을 빼주고 호흡곤란이 가끔 오기 때문에 코에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생식기에는 소변 줄이 달린 채 영양제를 투여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요청에 의해서 영양제는 주기적으로 들어갔다.
며칠 고생하다가 다시 좋아졌지만 혼미한 상태로 사경을 헤매던 할아버지는 체위변경을 하지 못하자 그만 엉덩이에 욕창이 생겼다. 침대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 스런 느낌이 드는지 환자는 있는 힘을 다해서 몸에 힘을 주는 바람에 체위변경 할 때는 체력소모로 온몸의 힘이 쫙 빠진다.
며칠 괜찮다 싶은 할아버지는 밤에 또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들들을 다시 소집했다. 꼭 한밤중에 일어난 응급상태라 곤하게 자던 아들들이 부리나케 다시 모였다. 가장 심각한 얼굴로 있던 할머니가 의사인 막내아들을 찾았다. 오지도 않은 막내는 뭐 하러 찾느냐고 다른 아들들이 핀잔을 줘도 할아버지의 생사를 아들을 통해서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들들은 새벽에 다시 집으러 돌아갔다.
막내아들은 처가의 도움을 받아 병원을 개업해서 병원 운영진이 처갓집 식구들로 이루어져서 형들의 불만이 많았다. 형들은 막냇동생이 대학에 남아서 후진들을 양성하는 교수로 있기를 바랐지만 처갓집 신세까지 지면서 병원 개업해서 형제 모임에도 나오지 않는다며 처가에 붙들린 인생을 산다며 노골적으로 불평을 늘어놨다.
법학자인 바로 위에 형이 테니스 치다가 어깨 아파서 병원에 치료받는다기에 동생병원으로 가냐고 물었더니 반갑지 않은 사람이 가면 좋아하겠냐며 딴 병원으로 간다 했다. 처갓집 식구들로 구성된 병원체제가 못 마땅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퇴근할 때까지 멀쩡하다가도 출근해서 보면 사경을 헤매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자식들은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호출당하는 게 지칠만해도 불평불만 없이 달려왔다.
사람의 목숨이 이다지도 질긴가 싶을 정도로 사경을 헤매다가도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거듭하자 할머니도 지쳤는지 이제는 고생 그만하고 돌아가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무리 치료해도 더 이상 호전되지 않고 죽음의 문턱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에 두 손을 들었다.
할아버지의 불완전한 호흡에 가족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미국에서 사업하는 아들 빼고 임종을 지키기 위해서 한 자리에 모여들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두 손을 쥐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당신이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도 고마웠고 지금까지 같이 있어 준 것도 고마웠소. 당신의 마지막 가는 빈손을 잡을 수 있어서 고맙소.”
산전수전 겪으며 살아왔던 날들을 정리하듯 할머니는 남편의 손을 잡고 이별식을 하고 있다. 산소 수치를 표시하는 모니터선이 하향곡선을 그리더니 “삐” 하고 경고음이 나왔다. 힘들고 고단한 삶을 내려놓고 완전한 자유를 찾아 떠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쥔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신앙이었다. 할머니의 두 눈에 흘러내린 눈물이 할아버지의 얼굴을 적시었다.
2015년8월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