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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의 꽃 Oct 27. 2024

눈 감으면 다가오는 것들


 눈 감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눈 뜨고 보면 눈에 보이는 사물의 아름다운 깊이를 느끼지 못한다. 눈 감으면 들리는 소리가 있다.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자연의 소리, 혼자 가만히 앉아있으면 구름 흘러가듯 흔들리는 새벽 여명의 바람 소리는 아름다운 나뭇잎의 움직임이 하나둘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는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삭막한 도심의 평화로운 연주자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귀로 듣고 느끼는 사물의 모습을 감상한다.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지 못한 것은 마음속에 가득한 욕심을 비우지 못한 탐욕 때문이다. 마음 비우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고 들리는 자연의 소리가 있다.

 집 앞에 있는 점자도서관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되어있다. 가끔 흰 지팡이로 더듬으며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희미한 빛에 의지한 저시력인들도 불편을 감수하고 도서관을 이용한다. 그들은 빛을 잃었지만 마음의 눈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하며 하얀 지팡이 끝에 희망을 싣고 도서관으로 모여 배움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다.


 어린 시절, 야맹증으로 부모님을 고생시켰던 일이 있었다. 여름날 밤에 마당에 멍석 깔고 저녁밥을 먹고 있는데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가 놀러 왔다. 밥상 위에서 밥 먹는 아이를 보고 할머니에게 큰손녀가 아무래도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밥을 먹으면서 반찬 그릇을 더듬거리는 게 이상하다며 아이가 손으로 반찬을 휘저으며 밥을 먹는데도 모르고 있냐며 할머니께 말했다. 가족들은 많은 식구가 희미한 호롱불 아래 한 밥상에서 식사하면서도 아이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지 못했다. 어머니는 밤하늘에 뭐가 보이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별빛이 흐르는 밤하늘의 아름다운 풍경을 밤눈이 어두운 아이에게는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이가 일부러 장난하는 줄 알았다. 일어나서 물을 떠 오라고 시켰다. 어림짐작 잡아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아이한테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안 보인다고 말하자 흠칫 놀라는 느낌이다.


 다음날, 어머니는 보리와 콩을 가마솥에 볶았다. 마을 어린애들과 청소년들이 밤에 호롱불을 켜고 오빠 손잡은 아이를 앞세우고 줄지어 동네를 돌았다. “새 눈은 깜깜 우리 아기 눈은 번쩍 훠이~” 앞장선 대표가 선창 하면 뒤따르는 아이들이 따라서 합창했다. 새 쫓는 가락에 맞춰 큰소리로 외치며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볶은 보리와 콩을 길바닥에 뿌렸다. 새들이 볶은 보리와 콩을 주워 먹고 밤눈 어두운 아이 시력을 새들이 가져가고 아이에게 원래대로 밝은 시력을 다시 돌려달라는 의식의 하나였다. 아이를 앞세운 청소년군단은 볶은 콩과 보리를 먹고 뿌리며 밤마다 놀이패들이 장단 맞춰 노래하듯 동네를 돌며 외치고 다녔다. 아이의 밤눈을 뜨게 해 달라는 믿음으로 신명 나게 열흘 밤 정도 새 쫓는 의식을 치렀다. 밤눈 어두운 것과 새가 어떤 연관이 있는 줄 모르지만 전해 내려온 민간요법의 하나였다.


 그해 초여름에 시작한 장마는 그칠 줄 모르고 하늘이 구멍 난 듯 비가 쏟아졌다. 애타게 기다리던 보릿고개를 겨우 넘겼지만 일 년 치 식량이 밭에서 수확도 하지 못하고 썩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을 주민들은 당장 식량 걱정해야 하는 허탈감에 빠져있었다. 이웃집에서 기르던 소가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죽었다.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냇가에 모여 소를 해체했다. 냇가에 핏자국이 있고, 잡은 소를 손질하느라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손저울에 고기를 다는 모습이 보였다. 해거름에 아버지는 손에 짚으로 묶인 물컹하게 생긴 물체를 들고 오셨다. 입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소간에 비타민 A가 많아 야맹증에 소 생간이 좋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소 잡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간을 사 왔다. 도마 위에 물체를 놓고 썰기 시작했다. 옆에 기름소금이 놓여있고 회초리도 놓여있었다. 유난히 식성이 까다로운 아이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소 생간을 먹일 생각에 아버지는 매와 생간 중 하나를 택하라는 압력이었다. 상황을 보니 도망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 앞에 꼼짝없이 불려 나간 아이에게 “약이다. 못 먹을 음식 아니다. 먹어야 밤눈 밝아진다.” 한 손에 회초리를 들고 소 생간을 기름소금에 찍어서 한 점씩 입속에 밀어 넣어 주었다. 코를 손으로 잡고 입속에 생간을 넣을 때마다 비릿한 냄새가 나면서도 고소한 뒷맛이 혀끝에 남았다. 생간을 찡그린 얼굴로 먹을 때, 몸에 좋은 특별한 음식은 아무나 먹을 수 없다며 아이를 위해 옆에서 막내 고모가 응원해 주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아이는 깜깜한 밤은 자유로이 움직이는데 제한적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야만 제대로 활동 가능한 한계적인 불편함을 아이는 어쩌면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밤에 시력이 서서히 어두워져 빛을 보지 못했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듯이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는 듯 단순히 밤은 깜깜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야맹증이 치료된 후, 밤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들이 그렇게 많은 줄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었다. 아이의 무딘 감성은 밤하늘에 새롭게 펼쳐진 풍경에 대해 어떤 동요도 없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반짝이는 별빛을 보고도 큰 감흥이나 흥분도 없었다. 소 생간을 먹은 덕분에, 아니면 할머니의 말씀대로 새 몰이 의식 덕분인지 그 해 여름 나는 야맹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안경을 착용하고도 생활이 불편하다. 책을 오래 보면 글씨가 흔들리고 어른거린다. 눈 감으면 영혼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조용히 방문을 연다. 눈 감으면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영혼을 흔드는 평화로운 내면세계가 펼쳐진다. 먹이를 찾아다니는 비둘기들이 구구거리며 나무 주변에 모여든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흔들림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로 내 앞에 나타난다. 눈 감으면 끝없이 밀려오는 소유 하고자 하는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영혼이 자유로운 행복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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