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거칠고 큰 손을 무공훈장증서 액자 위에 얹고 쓸어내렸다. 눈동자엔 숨길 수없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남편 떠난 지 삼십여 년, 먼저가신 남편을 만난 듯 애잔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아들은 보훈처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고 000 씨의 큰아들 되냐고 물었다. 순간 혹시 보이스피싱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6.25 전쟁에 참전한 국군용사들의 무공훈장을 찾아주는 입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고인도 훈장 대상자라며 훈장수령여부를 물었다. 이미 고향집까지 답사를 했는지 어머니가 거주하는 집까지 다 알고 있었다. 직접수령과 우편수령 중 선택하라기에 우편으로 신청했다고 어머니께 전화드렸다.
‘대한민국을 지킨 불굴의 투혼 영원히 이어 가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상자 안에는 무공훈장 증서와 기념패 등이 담겨있다. 무공훈장 상자를 어머니에게 전해주러 남편과 함께 시골로 내려갔다. 아들내외를 기다리느라 마루에 나와 계셨다. 늦가을의 따스한 햇볕이 어머니 어깨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다. 상자를 푸는 어머니 손이 떨렸다
“이제야 주인을 찾아왔구나.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아버지가 내게 보낸 선물이다.”
훈장증서를 가슴에 쓸어안았다. 남편의 체온인양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젊음을 담보로 전쟁터를 누비던 옛 시절이 눈앞에 서린다고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결혼하자마자 6.25 전쟁이 터졌다. 세상은 혼란스러웠다. 새색시를 남겨두고 신혼의 남편은 전쟁터로 떠났다. 시부모는 갓 시집온 며느리를 끔찍이 사랑했다. 그 따뜻한 사랑이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었다, 전쟁터에 자식을 보낸 부모의 마음은 애가 닳았다. 집안의 기둥인 큰 아들의 생사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시부모는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마을주민들은 이념으로 갈라졌다. 남로당에 가입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집요하게 며느리를 세뇌시키는 마을사람들이 있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집 밖에 나가지 말고 잠자코 집안에 있으라고 며느리의 바깥출입을 막았다. 자칫 이념갈등에 휩쓸려 부역자가 되는 길을 미리 차단한 시어머니의 현명한 판단 때문에 마을 주민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갈등의 회오리바람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갈 즈음 남편이 근무한 부대에서 편지가 왔다. 지리산 공비 토벌에 나갔다가 팔에 총상을 입고 순천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이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시아버지와 함께 아들이 입원한 순천도립병원으로 면회를 보냈다. 아들 얼굴 한번 보고 싶은 어미의 애틋한 감정을 억누르고 남편을 그리워할 신혼의 며느리에게 만남의 기회를 양보했다. 꾀죄죄한 몰골에 총상을 입은 팔에 붕대를 감은 아들이 나타났다. 시아버지는 아들을 붙들고 엉엉 울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시커멓게 거지차림 군복 입고 총상 입은 팔을 어깨에 메고 나타난 아들을 붙들고 엉엉 우는 시아버지를 본께 멀끄덤하니 서있는 내가 어색하더라”
시아버지는 겨울 찬바람에 추위에 떨고 있는 며느리를 보고 근처에 여관을 잡았다. 당신은 피곤하다면서 옆방에서 쉬겠다 하면서 아들며느리에게 나가서 저녁밥이라도 같이 사 먹고 오라고 했다. 며느리는 어른 혼자 두고 둘이만 나갈 수 없어서 남편에게 혼자 나가서 사 먹고 오라 했더니 정말 혼자 저녁밥 사 먹고 빈손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아내는 약국에 가서 소독약을 사다가 직접 치료하려고 붕대를 풀었다. 살이 부패될 정도로 상처가 악화되었다. 남편은 가려워서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나무젓가락을 붕대로 감은 환부주위에 넣고 긁어댔다. 전쟁 통에 의약품도 부족하고 의료 인력도 부족한 터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팔은 피부가 부풀고 흐느적거렸다.
하룻밤을 보내고 헤어질 시간, 아직 가슴이 끓는 젊은 신혼부부는 한 시간 후의 운명이 어떻게 갈릴지 모르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헤어질 시간을 맞이했다. ‘한번 시집가면 영원한 그 집 귀신이다.’라는 말을 불문율로 여기던 시대였으니 평생 홀로 수절하며 사는 여인의 삶을 살지도 모르는 운명이었다. 허락된 시간은 끝나가고 아픈 팔을 가슴에 안고 가는 남편의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생이별의 시간은 그렇게 끝났다.
밤낮 산속을 헤매며 공비들과 대척점에서 총부리를 겨누며 생사를 넘나들던 남편은 기나긴 군 생활을 마치고 팔에는 전쟁이 남긴 흉터를 지니고 그리던 집으로 돌아왔다. 참혹한 전쟁의 후유증을 겪은 시아버지는 아들에게 상이용사등급 신청을 하지 말라고 했다. 아들의 장애를 인정하기 싫어서였을까?
남편을 그토록 기다리던 새색시에게 행복한 신혼의 단꿈은 그야말로 꿈에 불과했다. 부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두 분은 크고 작은 일에 부딪치며 살았다. 가장의 책임을 제대로 하지 않은 남편은 술 마시고 놀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왔고 싸우는 날이 많아졌다. 접시가 공중에 떠다니고 밥상이 마당에 날아가는 날이 숱하게 많았다. 그나마 시부모가 딸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는 바람에 고난의 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다.
잔잔한 물 흐르듯 가는 세월이 아닌 고통의 세월과 싸우며 살아온 삶이었다. 세월은 젊음을 앗아갔고 남편과 사별의 아픔을 안겨 주었다.
“너희 아버지는 평생 일 안 하고 술 마시고 놀기 좋아하다가 나 혼자 남겨두고 자기 갈길 가버렸다. 곁에 있어준 것만으로도 나를 위한 건데 뭐가 그리 바쁜지 그렇게 빨리 가버릴 줄이야...”
가정을 책임져야 할 남편대신 억척스레 살아온 어머니는 남편의 빈자리를 많이 그리워하셨다.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그리는 바다 위에 서있는 망부석처럼 숱한 날들을 가슴속에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꼭꼭 누르고 살아온 그 긴 세월을 자식들은 과연 알기나 할까?
미움의 마음이기보다는 아내를 두고 일찍 세상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 섞인 그리움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어머니는 전쟁터를 누비던 남편의 흔적이 새겨진 훈장증서 위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비둘기처럼 날아온 훈장증서를 가슴에 품은 당신은 오늘도 꿈같은 과거의 추억 속에서 배회하고 있다.
“살아생전 너희 아버지한테 선물 한번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전쟁 끝난 지 칠십일 년 만에 너희 아버지가 내게 보낸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