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의 최남단 땅끝마을, 비 온 후 바닷가로 가는 길은 질펀하다. 산 위에 무리 지어 떠 있는 하얀 구름이 수평선과 닿아있다. 밭둑 어귀에 누렇게 뒹구는 호박이 여름 햇살에 살찐 몸을 드러내고 반짝거리며 누워있다.
바닷가에 서 있는 소나무들은 맨땅 위에 고양이 발톱처럼 앙상한 뿌리를 드러냈다. 척박한 땅위에 굵은뿌리와 잔뿌리가 얽혀서 서로의 지지대가 되어 불어오는 바람을 견뎌내고 있다.해풍에 시달려 수액이 말라버린 몸은 세월의 더깨를 몸에새기고 쩍쩍 갈라진 수피를 드러낸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볼품없이 바스러진 머리카락 같은 솔잎을 땅 위에 노랗게 쏟아 놓았다.한여름이되면 사람들의 그늘이 되어주고 사람들 발길에 밟히는 고난의 날들을 참으며 바닷바람을 맞고 있다. 철석거리는 파도가 밀려와도 묵묵히 그자리를 고수하는것은 몸을담은 고향을 떠나지않으려하는 시어머니 모습처럼 비친다. 뒤틀린 허리를 구부린 채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고단한 모습으로 운명처럼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솔밭 사이에 텐트를 치고 놀고 있는 아이들이 모래사장을 향해 달음박질한다. 모래사장 위를 걷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파도치는 바닷속으로 몸을 던진다. 밀물이 파도와 함께 들어오면 철석 거리는 파도를 따라 손을 잡고 노는 아이들이 물결을 이룬다. 바다에는 위험 경계를 알리는 노란 부표가 떠있다. 부표 사이를 돌며 아이들이 물장구를 마구 쳐댄다.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이는 한낮 철석거리는 물속에서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 하는 평화로운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해남 송호리 해수욕장에서 여름의 끝자락을 즐기는 아이들은 마음껏 자유를 향유한다. 물이 스며든 갯펄구멍 속에 작은 게 들이 숨어있다.갯펄에 구멍을파고 입구를 갯펄로 막아 놓는 위장술을 쓴다. 적자생존의 법칙은 미약한 생물 세계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이 보이면 집 속에서 몸을 감추고 있다가 사람이 갔는지 구멍 입구에서 살며시 동태를 살핀다. 자기들의 영역을 침범한 사람들의 발길이 지나간 자리에 작은 몸집을 밀고 나와 갯벌 위를 기어 다니며 그림을 그린다. 모래 위에 흩어진 조개는 껍데기 속에 갯벌을 가득 담고 관처럼 누워있다.
전날 쉬지 않고 쏟아지는 비는 고향으로 휴가 온 우리들의 발걸음을 묶어버렸다. 아무 곳도 가지 못하고 방 안에 있는 게 불편한 손자는 집에 가겠다고 투정을 부렸다. 계획대로라면 냇가에 가서 물고기도 잡고 할아버지와 바닷가에서 물놀이도 할 참이었는데 그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하루 넘기고 다행히 비가 그치자 손자와 약속을 지키고자 바닷가로 나왔다. 모래밭 속을 휘젓던 손자의 손바닥에 조그마한 게가 웅크리고 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엄마를 떠난 제 모습을 생각했는지 잡은 게를 물속에 내보내며 “엄마 찾아가” 하며 애처로운 눈길을 보낸다.
모노레일을 타고 땅끝 전망대로 올라갔다. 관광객들이 발자국을 남기고 지나간 자리에 또 다른 관광객이 모습을 나타낸다. 전망대 중간층에는 우리나라 지도모형 조형물이 서 있고 그 옆에는 귀여운 동물 우체통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손 편지가 없어진 시대에 전망대에서 통신수단의 중추 역할을 하던 추억의 옛것을 본다. 우체통은 흘러간 지난날의 유물처럼 시대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전망대 위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다. 그림처럼 떠있는 배가 지나간 자리는 하얀 거품을 일으키고 물살을 헤치고 움직인다. 땅끝에서 보길도를 오가는 연락선이다. 예전에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을 했던 여객선은 이제는 화물을 싣고 다닌다.
그림처럼 펼쳐진 어촌에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마치 조개를 엎어놓은 것 같던 마을은 언제부터인가 관광지로 변신하면서 상업 시설이 들어섰다. 밤에는 호화로운 조명이 켜지고 음식점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관광지의 면모를 갖췄다. 전망대 아래는 지역특산물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게 있다. 바닷가 주변 길가에 불경기라는 말을 확인해 주듯이 가게 앞에 진열된 팔리지 않은 물품주위를 맴도는 가게주인이 팔짱 끼고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시선을 보낸다. 맛 고장이라는 명성에 맞게 향토음식점과 횟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가게앞에 파라솔을 펼쳐놓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손님들앞에 회 접시를 들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여자종업원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삶에 지친 현대인들이 침묵의 바다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취해 마음속의 가득한 잡념을 날릴 수 있는 곳, 푸른물결따라 산책하던 관광객이 휘파람을 불며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
서쪽으로 기운 해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해안을 끼고도는 산책길이 있다. 해를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해풍을 맞으며 해안 길을 걷는 관광객들 모습이 종교의식을 치르는 순례객들처럼 보인다. 빼어난 자연환경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파도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며 산책하는 마음의 여유가 어린아이 같은 감성을 자아낸다. 몸을 감춘 해는 파스텔톤의 붉은 저녁노을을 부챗살처럼 펼치고 있다. 넉넉한 바다의 풍경을 뒤로하고 서서히 차를 움직여 집으로 향하는 도로변 밭에 해바라기들이 무리 지어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 햇볕에 영글어갈 씨방이 미소 짓는 해맑은 어린아이 얼굴 같다. 지난밤에 비를 맞고 해풍에 흔들리면서도 휘어진 몸을 힘겹게 유지하고 해를 바라본다.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은 게 아들이여!”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귓가에 들려온다. 해바라기는 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집에도 자식을 해바라기 하는 시어머니가 계신다.
“어머니, 이번 추석에 못 내려올 것 같아요.”
“늙은 어미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명절에 안 올 거냐? 나 살아있을 때 다녀라.”
아들을 해바라기 하는 어머니를 애써 외면하는 아들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다. 구름 속에 숨은 해를 따라가는 해바라기는 꼭 어머니 모습 같다. 우리는 여름휴가 때마다 바다가 부르는 유혹에 고향으로 간다. 고향 하늘 아래 붉은 노을이 짙게 물들어간다. 그곳에는 고개 숙인 해바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