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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수련 Dec 30. 2019

놀이가 나의 일입니다만

양수련의 호접지몽 에세이『혼자는 천직입니다만』북오션 출간 전 연재 ⑤

그날 아침의 엄마는 뭔가에 잔뜩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실의에 젖은 듯도 했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달래듯 엉뚱한 얘기들을 먼저 늘어놓는다. 그러면 엄마는 답답한 듯, 그게 아니라, 하며 당신의 얘기를 꺼내 든다.   

어제 말이야. 그 녀석이 지 아버지더러 '더 사시려고요?' 이랬다지 뭐니. 그만 살고 가란 거야, 뭐야?

엄마의 그 녀석은 남동생을 말하는 거였다.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이지, 그게 어디 진심이겠냐고 말을 에둘렀다.

이제야 살만한데, 내 손으로 농사지어 자식들 먹을 거 보내주고, 일 년에 몇 번 편하게 얼굴도 보고 이제 살만한데……, 더 사시려고가 뭐야? 나쁜 놈!

엄마는 노여움 같은 서운함을 털어놓았다.

아버지의 서운함과 노여움을 엄마가 대신 전하는 것임을 나는 짐작한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며 온갖 원망을 퍼부으며 살았다고 해도 엄마와 아버지는 결정적 순간이 오면 같은 편이 된다. 서운한 자식 앞에 두 분은 한마음이 된다. 평생을 함께 산 부부라는 게 저런 건가 싶게 말이다.

어쨌거나 엄마는 다른 자식에게는 말하기 곤란한 속마음을 가끔씩 내게 풀어놓는다.

언니는 조곤조곤 말하고 듣는 성격이 아니다. 남동생은 엄마가 느끼기에 건성으로 흘려듣는다. 그렇다 보니 엄마의 불편한 마음을 해결은 못해줘도 잘 들어는 주는 내게 전화를 하는 편이다.

너한테만 하는 얘기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하지 말라고 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나 모르게 언니나 동생에게도 또 다른 속내를 털어놓고 있을지도.      

어쨌거나 엄마는 뭘 어떻게 해서 끼니를 때우나 막막하던 날들의 연속이었다고 엄마의 지난날을 술회한다. 그 힘들던 그 시절이 아득해진 지금이 엄마에겐 최고의 날들이다. 비록, 온몸에 세월을 새겨 넣기는 했지만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며 마음은 그 어느 부자 못지않게 풍요롭다.

엄마는 당신의 힘으로 하루 세끼 걱정 없는 여유로운 날들을 이뤄냈다. 인생의 숙제도 다 끝냈다. 이제야 삶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데, 걱정 없이 살고 있는데, 검은 머리 허옇게 되고 몸짓은 더뎌졌지만 지금이야말로 행복의 순간인데 말이다.

동생의 "더 사시려고요?"는 빈말일망정 그분들의 가슴 언저리를 후벼 파고 만 것이다.

나는 엄마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엄마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듣는다. 엄마의 말에 호응하는 말을 추임새처럼 넣으면서 엄마의 인생을 내 멋대로 또 더듬는다.

이제 그만, 너 좋아하는 일이나 해.

엄마는 울분 아닌 울분을 한참 쏟아내고서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나는 놀지 못했다. 엄마 인생의 숙제란 말이 떠올라서였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길러내고 출가시키는 일.

엄마 연세의 어른들 대부분이 그 일을 당신들의 숙제처럼 여겼다는 사실이다. 엄마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신 인생의 숙제를 훌륭하게 끝냈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그 시절을 자식을 놓지 않고 건너왔다. 교육에 대한 부채 갖은 열망도, 생에 대한 욕심도 덜어놓은 지금이야말로 엄마에겐 황금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비혼인 나를 숙제처럼 또 끌어안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비혼인 딸을 둔 엄마가 엄마뿐도 아닌데.

"엄마, 나이 먹어보니까 알겠어. 내 나이가 되니까 갔다가 돌아오더라고. 내가 결혼 안 한 게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그냥 이혼했다 쳐."




P.S

양수련의 호접지몽 에세이 [혼자는 천직입니다만]

차례는 있으나 연재의 내용은 순서와 다르고 내용도 제 임의로 선택해 올립니다.

이야기 전체는 출간본으로 만나보실 있습니다.

제게 행복은 좋은 것이거나 기쁨의 순간에만 해당되는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물론 행복하다는 것은 좋은 상태일 것입니다.

평온한 행복도 있지만 긴장된 상황의 행복도 있다는 걸,

불안하면서도 설레는 상황에서의 행복도 있다는 걸,

행복의 그림자 또한 다양하다는 것을 살면서 알아갑니다.    

소설 같은 에세이, 그 안에 담긴

저만의 유별나고 소소한 행복이 무엇인지 궁금하시다면 추천해 드립니다.


하나 더, 사진은 이미지용으로 글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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