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수업 시간이었을 거야. 내가 하던 거 빨리 끝내고 너와 놀아야지, 했어. 하지만 늘 마음뿐이었던 같아."
"아니 왜?"
"막상 내가 내 할 일을 끝내고 나면, 넌 벌써 저만치 가서 혼자서 뭔가를 하고 있거든. 넌 이미 또 다른 것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너와 노는 일이 내 마음처럼 되진 않더라고."
"내가 그랬구나."
나는 괜스레 미안했다. 그리고 씁쓸했다. 나와 놀기 위해, 뭔가를 함께 하기 위해 부지런히 몸과 손을 놀렸을 제이를 내 뒤에서 머뭇거리게 만든 형편없는 짝꿍이었던 거다.
또 한편으로는 그때도 나는 혼자 노는 아이였구나, 싶은 생각이 짙게 다가왔다. 친구들과 무리 지어 다니지도 않고, 단짝과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누지도 않고, 사춘기 여학생의 수다스러움도 없이.
내 모습인 게 확실하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된 내 모습은 낯설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다.
"네 얘기 좀 해봐.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나는 서둘러 화제를 제이의 삶으로 돌렸다.
제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줄줄이 꺼내놓았다. 간호사가 된 얘기부터 남편을 만난 얘기, 자식들에 관한 얘기들을.
내가 건너온 생이 미궁에 빠진 기분이다. 타인과의 관계에 기대어 건너온 날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내 기억이 흐려서이기도 하겠으나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할 것이다. 제이가 내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나와는 무관한 딴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앉아있다.
한때는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같은 시간을 누려왔을 것임에도 내겐 아득하고 먼 사람의 일처럼 다가왔다. 어쩌면 한때는 같은 꿈을 꾸었지만 시간이 낳은 서로 다른 프리즘에 눈을 비비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이와 나의 대화는 두어 시간을 넘기고서야 마무리됐다. 제이를 기차에 태워 보내고 돌아선 나는 제이가 했던 말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짝꿍도 뒤로하고 나는 그때 혼자서 무엇을 했던 걸까.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엄마의 걱정을 살만도 했다는 생각에 이제와 웃음이 나기도 한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내가 엄마는 걱정이 됐던 거다.
딸의 타고난 캐릭터를 몰랐던 엄마의 노파심.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으나 내가 그들을 따돌렸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제이의 말을 들어봐도 그냥 혼자 꼼지락거리며 노는 일이 내게는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직원이 한 명뿐인 회사를 혼자여서 좋다고 몇 년씩 다닌 것만 봐도 그렇다. 내 사회성을 문제 삼아 졸업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는 대학 선배의 말까지 더하면, 나는 혼자형의 인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기적인 인간형이란 뜻은 아니다.
일인 가구가 해마다 늘어가고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는 단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인다. 자고로 혼자가 익숙한 혼자의 시대가 됐다. 혼자가 일상인 시대가 됐다. 혼자 다니고, 혼자 놀고, 혼자 생활하던 나의 일상들이 다른 사람들의 걱정을 샀다면 이제는 아니다. 왜 결혼하지 않느냐고 내게 뜨악한 눈길을 보내지도 않는다.
비혼이라고 위기의식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렇게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면 외롭거나 우울증이 생기지 않겠냐고 누군가는 염려도 한다. 그런 걱정은 넣어두라고 아니 쓰레기통에 버려달라고 정중하게 청하는 바다.
나는 어쩌면 내가 갖고 태어난 캐릭터상 혼자의 시대를 남들보다 일찌감치 누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혼자라고 외로움을 잘 타지도 않고 혼자 있는 고독의 시간이 더 달콤한 것을 보면.
나의 혼자는 어릴 때부터 내 몸에 익어온 나의 생활이다. 고독함으로 다가오는 시간들은 나를 풍요롭게 만든다. 사색하게 만들고 상상하게 만들고 글을 쓰게 만든다.
그리고 노련해진 혼자는, 둘이서도 잘 놀고 셋이서도 잘 놀고 여럿이서도 잘 어울린다. 혼자는 내게 천직이나 다름없고 지금은 '혼'자인 사람들의 시대에 다름 아니다. 여섯이 있어도 혼자고 셋이 있어도 혼자고 둘이 있어도 혼자다.
누구에게나 혼자는 천직이다. 결혼을 했던 안 했던, 가족이 있든 없든.....
P.S
양수련의 호접지몽 에세이 [혼자는 천직입니다만]은
차례는 있으나 연재의 내용은 순서와 다르고 내용도 제 임의로 선택해 올려드렸음을 알려드립니다.
각 꼭지의 남은 이야기와 공개되지 않은 다른 이야기들은 출간 본에서 만나보실 있습니다.
좀 더 정리된 모습으로.... :)
제게 행복은 좋은 것이거나 기쁨의 순간에만 해당되는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물론 행복하다는 것은 좋은 상태일 것입니다.
평온한 행복도 있지만 긴장된 상황의 행복도 있다는 걸, 불안하면서도 설레는 상황에서의 행복도 있다는 걸,
행복의 그림자 또한 다양하다는 것을 살면서 알아갑니다.
소설 같은 에세이, 그 안에 담긴 저만의 유별나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무엇인지 궁금하시다면 추천해 드립니다.
사진은 이미지용으로 본 글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하나 더, 출간 전 연재의 공개는 아쉽지만 여기까지입니다. 전부와 만나게 될 그날을 기대하며 2020년 여러분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그리고 뜻한 바를 모두 이루시는 한 해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