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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Apr 22. 2020

길 고양이로 인한 단상

우리. 그들.... 그리고 시선

"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렇게까지 말해요? "라는 40대 아주머니의 말에,

" 아니. 이런 거라뇨? 지저분하잖아요. 그리고 시끄럽고, 징그럽고. 그러니까 이러실 거면 데려가 키우시라고요." 5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의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를 들으며 그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가지가지마다 겹으로 핀 매화꽃이 풍성하고, 발아래 화단 언저리에는 노란 민들레 꽃이

듬성듬성 화사한데, 대체 무슨 일 일까 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계속되는 언쟁에 밀려난 듯한 어르신 한분이, 한켠에서 멋쩍은 모습으로 엉성하게 서 있었고, 그분의 손엔 작은 봉투와, 반려동물용 통조림. 그리고 나무젓가락이 들려있었다.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어르신은 날마다 고양이 밥을 주신다. 그래서 고양이들이 아파트 단지에서 떠나질 않는다.

한 아주머니는 어르신 편에서, 가엽고 불쌍한 동물들을 위해서 애쓰시는 걸 오히려 칭찬해야 한다.

다른 아주머니는 더럽고, 불결하고, 징그럽다. 더구나 가끔 싸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

그리 불쌍하면 집에 데려가 키워라, 다른 사람 불편하게 하지 말고.

나름 논리와 명분을 내세우며 벌이는 언쟁인지라, 승. 패가 나질 않는 다툼이고, 더구나 개인과 공동체의 명분으로 전개하는 50대 초반의 아주머니의 주장은, 감정을 말하는 다른 아주머니의 주장보단 현실적으론 옳을 수 있다.라는 생각도 잠시 스친다. 사실 고양이라고는 근 5~6년 동안 서너 마리에 불과한데....


휘~이익! 소란이 무서운지, 저만치 떨어져 있는 우리 집 강아지를 불러 가슴에 안고,

어르신께 가벼운 미소와 인사를 드렸다. 강아지와 산책 중 자주 만나기도 하고, 가끔은 의자에 앉아 소소한 대화를 나누면서 지내는 옆 동 1층에 사시는 분이다.


" 저도 강아지 몰티즈종을 13년 정도 키웠다가 몇 년 전에 하늘로 보냈습니다 "

2년쯤 됐나? 그분께서 나와 산책하는 강아지를 쓰다듬으시면서 내게 건넨 첫 마디셨다. 출가시킨 자식들보다 훨씬 사랑스러웠다는 말씀과, 노년의 부부를 행복하게 해 줬던 유일한 존재가 그 강아지였다는 말씀을 하실 때, 착시였는지는 몰라도, 촉촉해지는 눈빛이 언뜻 스치기도 했었다.

그러다 지금은 단지 내, 길고양이들을 돌봐주신다는 말씀과 하루 한번 사료와 통조림, 그리고 물을 갈아주신다며 수고와 비용도 쏠쏠치 않지만, 그것들도 살아있는 생명인데 이 나이 되어보니 쉽게 지나칠 수 없게 되더라. 그래서 시작한 게 벌써 8년이 넘었다며, 계단 위 한 군데 더 가신다는 말씀과 함께 걸음을 옮기셨다.


우리 집 에어컨 실외기 구석엔 비둘기 한쌍이 살고 있다.

벌써 3년의 겨울을 함께 보냈으니 이젠 서로에게 나름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창문을 열기 위해 다가서면 화들짝 놀라 멀리 허공으로 냅다 도망가던 녀석들이, 이제는 몇 걸음만 옆으로 움직이며 멀뚱 거리며 쳐다본다.

그중 한 마리는 밖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흰 꼬리와 짙은 회색의 멋진 털을 갖고 있다. 언젠가 집으로 돌아오는 동네 골목길에서 마주한 녀석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혼자만 인사를 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실외기 주변을 철망으로 나름 촘촘하게 엮어 방어를 했는데. 어느 날, 어디로 들어왔는지 한쪽 구석에서 두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걸 알게 되었고, 이것도 인연이란 생각과, 많고도 많은 곳 중, 이곳에 둥지를 튼 녀석들이 왠지 고마운 마음마저 들면서 동거를 받아들였다.

그 후로 대 여섯 번쯤 산란과 부화를 반복하면서, 갓 태어난 새끼 비둘기를 직접 보는 호사를 누리게 되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의 어린 녀석들이 너무도 뻤다. 첫 비행을 시도할 때, 운 좋게도 감동의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비록 먼 곳이 아닌 아파트 그림자를 벗어나지 않는 짧은 비행이었지만, 새끼 비둘기의 그 자랑스러운 마음을 함께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더욱 감동으로 다가왔었다.

상주한 비둘기로 인한 또 하나의 변화는, 다른 비둘기들이 우리 집 쪽으로 얼씬도 못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영역 사수의 본능에 따른 투쟁으로 얻는 역 현상. 그래서 우리 집 베란다 밖 공간은, 여타 다른 곳보다 오히려 깨끗하다.

비둘기 똥냄새를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다면, 까짓 2년에 30분 정도만 직접 청소하자. 하는 생각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의 영역 내에서는 또 다른 생명의 번식과 안주가 베푸는 행복은 경험치 못했을 것이다.


많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공통된 심리가 있다. 그중 하나는 그들 스스로 반려동물의 아빠, 엄마, 누나, 언니라는 가족만이 얻을 수 있는 호칭을 그들에게 준다. 다시 말하면 반려동물은 비록 이종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공동체중 가장 근간이면서도 끈끈한 애정으로 뭉쳐진 "가족"이란 울타리 안으로 불러들인다.

그만큼 그 생명체들과 교감되는 감정의 영역은 깊고, 넓다고 할 수 있다.

강아지든, 고양이든. 아니면 여타 다른 반려동물이든지 간에, 오롯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인에게 맡기며 의지하는 모습을 보면, 그것은 아마, 함께 해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감동과 사랑의 환희가 아닐까?


산책을 끝낸 강아지는 내 무릎 위에 엎드려 졸고 있다.

아까 그 언쟁은 어떻게 결론지었을까? 아니 결론이 나기는 했을까? 나도 내 생각을 말했어야 했나?

산책 내내 마음이 불편함을 느끼면서 길고양이들을 생각했다. 그 길냥이들은 날마다 나와 우리 강아지가 만나는 익숙한 녀석들이다. 노란색과 얼룩 줄이 거의 반반이라서 '노룩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노란색이 많고 검은색이 조금 들어가서'노검이'라고 부르고. 흰 바탕에 검은 줄이 여러 개라서 '줄검이'라고 부르는 녀석들이다.

그 외 가끔 다른 한, 두 마리 정도.

다들 사납지도, 날카롭지도 않아 단지 내 어떤 강아지들과도 한 번도 다툼이 없었던 순하디 순한 녀석들.

보통 길냥이들의 수명이 3년~5년 정도로 짧다는 게 실감될 정도로, 그 녀석들은 몇 년 전만 해도 화단을 폴짝 이 든 어린 녀석들이었다. 그 사이 큰 녀석들은 어느 날부턴가 보이질 않으면서, 안타까운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것도 내가 본 녀석들의 성장기 중에 하나다.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공동주택.

위협적으로 크게 해가 되지 않고, 도저히 살 수가 없을 정도로 불편하지 않다면. 같이 살아갈 수는 없을까?

그들의 생명을 경시하는 마음보다는,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조금만 바꿔준다면.

"생명의 무게는 어느 것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면 조금은 무리가 있지만, 생명이란 존재는  그만큼 소중하고, 경이롭다고 조금만 바꾸면 삶이 더욱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노숙자=길에서 자는, 생활하는 사람.

길 고양이= 길에서 살아가는 고양이. '

두 단어 모두, 집안에 있으면 누군가의 소중한 식구이고, 반려묘인데.

안팎의 차이가 이리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들의 시선, 즉 경시하는 시선 때문이 아닐까?

물론 사람과 동물을 비교한다는 건 어불성설인 것은 잘 알지만, 단지 처한 환경에 관한 질문이 팩트이다.


"아마 살아있는 동안은 매일 밥을 주겠지요. 고양이들 말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이요 허. 허. 허.

내가 먼저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가 되었으니, 사는 동안이라도 굶지 않게 하려고요"


우리 집 강아지 쫑 장군이 숨을 쉰다.

허벅지에 밀착된 녀석의 따스한 체온과, 일정한 심장박동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창밖의 매화나무 아래엔, 하얀 꽃 비늘이 점점이 떨어지고 있다.

계절은 이미 봄이건만, 마음은 아직 겨울인 듯 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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