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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Apr 21. 2020

50~ 쯤 되면

삶이 다르면 길도 달라진다

밤사이 흩뿌리고 지나간 빗방울의 신선한 공기가 맑은 햇살을 코팅하고 매끄럽게 빛났다.


가만히 커피 한잔과 마주하다, 문득 어제 일의 잔상이 내가 조금 과했나 란 자책과 그에 반하는 위로가 어설피 얼버무려 동시에 피어올랐다.

"요즘 젊은 여자애들은 시부모를 무시하는 게 무슨 자랑처럼 생각하고 있어, 시집왔으면 시댁 귀신이어야지. 옛날 같으면…. 어휴~"

무심코 뱉은 한마디가 논쟁을 넘은 작은 소란의 단초가 돼버린 것이다.

예전 업무와 관련한 지인과의 약속으로 부암동 근처에서 식사하게 되었다.

본래 약속된 인원은 나를 포함 3명이었는데, 예고 없는 두 명의 처음 보는 사람들이 참석해 5인이 되었다. 문 앞에서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지인의 말에, 개의치 말라며 흔쾌히 동의하였고 우리는 곰탕과, 수육 등을 주문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간단한 인사 뒤 의례 명함이 뒤따랐다.

“이런, 저는 퇴직 해서 명함이 없는데….” 하며 양해를 구하고 명함을 살펴봤다.

ㅇㅇㅇ유통 대표이사 아무개. ㅇㅇ주식회사 상무 아무개. 서로 나이는 묻진 않았지만, 얼추 50대 초, 중반쯤 하는, 아직도 왕성하게 경제활동 중인 그들에게 살짝 부러움이 일었다.

따끈한 곰탕과 수육에 한두 잔은 곧이어 사업 얘기와 사는 얘기를 지나, 어느덧 자식들 이야기로 이끌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글쎄 요즘 애들이 그렇다니까. 우리도 얼마 전에 형님이 며느리를 들였는데 걔가 하는 걸 보면 내가 다 열 받는다니까. 형수가 그러는데, 집에 오라니까 무슨 한 달에 두 번씩이나 오냐고, 불편하다고 신랑을 쪼았나 보지? 애먼 신랑만 형수한테 한 소리 듣고. 벌써 뒤에서 신랑을 앞세우는 걸 보니 훤하게 보인다니까" 


이 나이쯤 되면 남녀 누구랄 것도 없이 자식들 이야기가 주된 소재로 된다는 걸 실감한다. 

술과 별로 친하지 않은 나로서는 음주 좌석에서의 총총히 살아있는 의식이 때론 불편한 적이 있다. 다들 기분 좋게 취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데, 멀쩡한 내겐 끊임없이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수다들을 듣고 또 듣는 고충과 인내의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들은 주로 오랜 친구들이기에 언제나 고충은 아니었다. 듣다가 짜증 나면 그대로 뱉어도 좋을 친구들이니까.     

"뭐지? 아직도 저런 사고방식의 조선시대가 남아있네"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안색이 굳어졌다. 입에 침을 튀기고 흥분하는, 첫 대면의 대표이사를 힐끗 보고 수육 한 점을 입에 넣을 때, 나를 보며 질문인지 동의 구하는 건지 모를 자신의 말끝을 올렸다.

"그러니까 시부모들은 결혼한 자식을 자주 보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전화하라고 하는 게, 자주 오라는 게 그렇게 잘못하는 겁니까? 어른을 우습게 보는 게 아니면 어디서 감히…. 쫓아버려야지." 살짝 붉어진 얼굴이 술 때문인지, 흥분해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군요" 내 짧은 호응에 순간 당황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속의 말은 이랬다. ‘아직 그런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있다는 것에 난 아무말하고 싶지 않아 꼰대야’ 하지만 그럴 순 없잖은가. 오늘 처음 본 사람이고, 지인의 입장도 있으니 그냥 입을 닫아야지. 듣고 있던 지인도 약간의 과열되어 성토의 장이 되어버린 좌중을 수습하려 화제를 돌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옆에 있는 상무라는 사람의 한마디가 기어이 나를 진흙탕에 입수하게 했다.

"부모 탓이야. 시집갈 땐 시부모에게 잘하라 하면서, 정작 딸들 편을 들잖아. 위선적이지"

동조인지, 소신인지 모를 말에 침을 맞은 듯한 불쾌감에 욱하고 퉁겨졌다.


"시댁 귀신이라 했나요?" "쫓아낸다고 하셨어요?" "위선적이라고요?"

조용하던 사람의 느닷없는 참여는 그들의 시선과 묘한 표정의 얼굴들을 끌어당겼다. 

“시대가 바뀌면 의식이 바뀌는 게 당연한데. 그거 아십니까? 예전에는 시집보다는 장가를 갔던걸. 여자 집에 살면서, 첫 아이를 낳아야 비로소 남자 집으로 가는 걸 허락했고, 심지어 여자 집에서 평생을 사는 일도 흔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래서 남자는 여자 집에서 머슴 산다고 해서 머슴애, 제 집에 산다고 해서 제 집에. 그게 계집애로 바뀐 거고. 굳이 옛날을 말해서 꺼낸 거였고. 그리고 시댁 귀신. 그건 조선의 사대부에서 여자들을 폄훼하는 악습 중 하나인 걸 아셔야죠. 지금 상무님이나, 대표님의 자제분들은 성별과 나이가 어찌 되는지 모르겠지만 사위든 며느리든 그런 사고방식으로 결혼시킨다면 아마도 많이, 많이 곤란해지실 겁니다. 시댁 귀신이라니, 인공 지능이 사람처럼 된 시대에.”

의도치 않았지만, 살짝 격앙된 것을 진정하려 큰 숨에 막걸리 반 잔을 들이켰다.

“쫓아낸다는 말도 그렇습니다. 누구랑 결혼합니까?” 하고 운을 뗀 뒤, 왜 이렇게까지 하나라는 한심한 감정이었지만, 결국 잇고 말았다.

“부모가 자식의 결혼을 결정하나요? 이혼시킬 권리가 있습니까? 설사 부모의 기대에 조금 부족하더라도 자식들이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대견하지 않습니까? 며느리를 쫓아낸다고요? 그게 말입니까, 방귀입니까.”

순간 어수선한 분위기에 그들의 입술이 들썩였지만, 개의치 않고 마저 이어갔다.

“위선이라. 세상엔 급부가 있습니다. 물론 새로 형성된 가족도 가족인데 가족끼리 무슨 급부냐고 말할 수 있지만, 사위나 며느리. 두 사람 모두 새로운 관계에 적응하고 안착할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누군들 서로의 부모께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어른들의 시간과 생각이 아닌 그들의 시간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건 살아온 우리 시대보다는 지금 그들의 시대가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가장하면 남자. 모든 걸 책임지고 감내하고 살아왔지요. 그때의 여자들은 대부분 가정에서 살림과 육아에만 전념했던 시대입니다. 그건 당신들과 내 부모님이기도 합니다. 그 모습들이 그대로 우리에게 답습되었고, 사고와 가치관 형성에 깊숙이 개입한 겁니다.

가장이 따로 없는 요즘 아이들은 능력껏 벌고, 서로 나누어 역할 분담을 하고 사는 세대입니다. 그렇게 변한 세상일진대 결혼 전엔 시부모께 잘하라 하고 나중에 편든다고요? 그게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하는 걸까요? 조금만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고충이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시댁의 지나친 간섭 내지는 요구. 그 지나치다는 건 현실의 아이들 생활을 생각지 않고 권위를 앞세운 무리한 요구가 지속적일 때. 둘 사이의 이견으로 불편해질 때, 서로 최소한의 인격과 삶의 영역을 침해할 때 등, 다양한 이유로 내 아이가 힘들고 괴로워하는데 어느 부모가 너는 그 집 귀신이니 참아라, 그러다 쫓겨난다. 말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혹시. 진짜 그런 부모가 있다면 그건 정말 개 같은 부모죠.” 

순간 강한 어조로 뜨끔했지만, 이미 뱉은 말. 늦어버렸다. 잠시 멍 한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일정액의 현금을 탁자에 올려놓으면서 지인에게 눈인사로 양해를 구하고 일어섰다.

“나는 세상에 대통령은 박정희만 있는 줄 알고 자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을 나도 알고 당신들도 알고 있질 않은가?”라는 말을 끝으로 그곳에서 나왔다.


청운동 방향으로 걸으면서 밀려드는 자괴감에 호흡이 가빠져 왔다. 어쩌면 세잔의 막걸리로 인한 과음 탓일 수도 있지만, 어쭙잖은 훈계가 원인일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흥분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 아이들도 머지않아 결혼할 것이다. 비혼주의가 아니기에 그리 생각한다.

나는 언제부턴가 시집 간다라는 말을 쓰지 않고 결혼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사전적 의미완 별개로 왠지 무언가에 구속되고, 예속되는 뉘앙스가 싫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따금 해 주는 말 중에 유독 진심을 담는 것이 있다. 여자로 살지 말 것이며, 아내와 엄마로 자신의 삶을 방치하지 말라는 조언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부터 내 것은 스스로 하게 교육을 받았다. 우리 형제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빨래든, 정리든 설거지든. 당시의 가정에서는 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것이 바탕이 되었는지 결혼하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잡다한 집안일을 당연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 자세는 변했다. 살아보니 가정이 어수선하고 뭔가 불안할 때 대부분의 원인은 아내가 힘들어할 때라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진리를 터득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중심이 흔들리면 주위는 영향을 받는 것이기에 자립심을 키운다는 명분으로 우리 아이들 역시 중학생 때부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교육했다. 하지만 숨겨진 의도가 있었으니, 성인이 될 때까지 엄마의 안쓰러움으로 아이들에게 헌신할 아내의 수고를 덜고자 함이었고, 자잘한 뒤치다꺼리의 피곤함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다. 나이 50이 넘자,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 나 죽으면 누가 내 아이들을 보살펴 줄까 하는 생각에 이따금 우울해지기도 하고, 흔히들 아까워서 어떻게 남 주냐는 딸 바보 아빠의 헛헛함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딸아이들에게 최소한 나와 같은 든든한 한쪽이 대신하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훨씬 행복한 걸 알게 되었다. 사위든 며느리든 양쪽 집에서의 존재감은 너무도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들이다. 이걸 인정했으면 한다. 어쩔 수 없이 부모 세대의 잔재가 남아있는 우리 낀 세대 부모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런 의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부모들의 무엇이 아닌, 그들끼리의 우리가 되는 걸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고의 전환. 우리는 우리의 삶의 길을 살았을 뿐, 그들에게 우리를 답습하길 바라는 우매함은 조금도 남겨서는 안 된다. 그들 사회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격려하면서, 우리의 삶을 추억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리면 될 뿐이다. 

    

"누군가의 동쪽은 다른 이에겐 서쪽일 수 있다. 길 역시 삶이 바뀌면 달라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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