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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Jun 15. 2020

일사병. 그리고 짜장면  1

나에게 짜장면이란....

여름이라고 하긴 이른 때인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불볕 태양이 작렬하고 있다.

여느 때처럼 나선 산책길이 마스크를 탓하지 못할 만큼 호흡이 부담스러워지고, 달궈진 산책로에는 때 아닌 먼 시선 끝의 아지랑이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아니면 서둘러 온 여름의 열기던가?


주말의 한가로운 오전 끝 머리 시간이지만 거니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유난히 따릉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눈에 띄었다. 그중 둘둘 삼삼 가벼운 옷차림으로 타고 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걷는 것도 이리 더운데 모자라도 좀 쓰고 타지.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보게 된다.

표지는 초여름인데 내용은 여름 한 복판을

써가고 있는 아주 더운 날이다.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더위를 피해 벤치를

찾아 앉아 냇가의 비둘기들이 깃털에 물을

적시며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다가 떠오른

아련한 어린 시절, 그때가 찾아왔다.


국민학교 3학년쯤. 여름 방학 전이었다. 아마도 일요일이 아닌가 싶다. 당시는 주말에 쉬는 그런 때가 아니었으니. 담임 선생님과 또 다른 선생님. 그리고 친구 한 명, (현재는 국내 모 신문사의 기조실장으로 아직까지 잘 버티어 주는 친구)과 나는 자전거를 타고 의정부까지 왕복으로 다녀오는,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와 친구에게는 다소 버거운 일정의 고난의 따릉이 계획에 동참하게 된 일이 있었다. 그때의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 꽤 먼 거리인데 너희들에겐 무리다. 꼭 가고 싶다 길래 끼워는 주지만, 중간이라도 힘들면 반드시 돌아간다고 말해라." 하고. 선생님 두 분의 일정에 우리를 합류시켜 주셨다. 그 시작은 친구가 선생님한테 끈질기게 졸랐던 때부터이다. 육성회장님의 아들로서, 우연히 선생님들의 계획을 접하고 끼워달라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것도 몇 날 며칠을.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지금 생각해보면 막강한 육성회장님의 아들 부탁을 거절하기엔 다소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친구는 그 참에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멀리 가보고 싶었다고. 나중에 병문안을 와서 미안하다며 한 말이다. 하긴 내가 봐도 멋지고 튼튼한 삼천리 자전거를 가지고 있었으니 나였더라도 충분히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사정은 그렇지 못하였기에 애초에 생각이 없었던 일정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절친 중의 절친인 친구가 같이 가자고 하는 숱한 종용으로 결국은 그 일정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하긴 돌이켜 보면 그런 끈질김이 평 기자로 시작해서 지금의 모습으로 이르렀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출발은 가장 어린 나이에 부모님 없이

집에서 멀리 가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큰 도로 외에는 비 포장길이 대부분이었던 길을 대략 한 시간여 정도 갔을 때 어린 마음에도 우려되었던 자전거가 고장이 나 버렸다. 당시 "자전거 포"라는 시간 단위와 하루 단위로 일정 금액을 받고 빌려주는 곳에서 가져온 허름한 자전거가 결국은 버티질 못한 것이었다. 체인이 끊어지고 또 그것이 자전거 뒷바퀴 축에 깊게 박혀버려 뒷바퀴조차 굴러가지 않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선생님들이 애써 상황을 수습하시려 해 보셨지만, 결국은 내가 혼자 다시 돌아가는 걸로 정리가 되었다. 그렇게

선생님들과 친구를 보내고 혼자 서 있던

한 여름 낮 땡볕 아래 검게 그을린 키 작고 땀이 범벅이 된 어린아이. 속상해 울먹이는 것도 잠시 집으로 돌아가는 큰길에서 나는 구르지도 않는 자전거를 질질 끌다시피 몇 시간이었는지도

모를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멀고 더웠던지 결국은 사달이 나고 말았다. 엄마가 자전거포에 가서

그런 자전거를 아이에게 빌려 줬다고 한바탕 뒤집어 놓은 일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그날 저녁 일사병 초기의 증세를 보인 나는 밤새 간호하시던 어머니에 이끌려 아침 일찍 병원에 가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지금도 그때의 아팠던 기억이 조금은 남아 있으니 꽤 심했던 모양이다. "정 의원 " 동네 유일한 병원이기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름이 또렷하다.

기억을  잡아준 또 하나의 장소.

같은 출입구에 좌, 우로 갈라져 있었던

" 중화반점 "이라는 짜장면 집이 있었기에

더욱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다.


열이 꽤 높게 오르내리고 있는 중에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고소한 짜장면 냄새가 고열의 혼미한 증상보다 더 나를 어지럽혔고,

늙은 의사 선생님의 말은 귀에서 파리 날개 짓

처럼 우웅우웅거렸지만, 창 너머 주방에서

도마를 내리치는 칼 소리만큼은 이상하리 만치 선명하게 들려왔다, 간호원 누나의 살갗을

찌르는 주삿바늘의 아픔보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짜~자~앙!" 하며 가져가라고

소리치는 주방장의 그 소리에 목이 타는 듯

더 아파왔었다. 그렇게 고열과 설사, 복통을 어가며 몸과 마음의 아픔을 견디는 며칠을 보내니, 퇴원하는 날에 어머니가 고생했다고 짜장면을  주신단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로 새우깡 한 봉지를 받아 든 지난겨울의

그 기쁨을 느끼며 너무 좋은 나머지 신발도

양쪽을 바꿔 신고 짜장면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음 글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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