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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Jun 10. 2020

로망이 되어버린 실연(失戀)

"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정동진역에서 묵호항까지


서둘지 않는 걸음으로 산책하 듯 걸어왔던 길은, 최소한 나에게는 자유스러운 의식의 흐름을  함양(涵養)시켜주며, 그 흐름을 타고 격식 없이 모든 사색(思索) 소통할 수 있는 길 위의 공간을 제공해 주는 곳이다.

나에겐 동해안 길은 그런 곳이다.


어스름한 저녁시간. 묵호 시장 내 생선구이로 저녁을 해결하고, 근처의 민박집에서 샤워를 끝낸 후 TV를 보다가, 잠을 좀 더 푹 자볼 요량으로  맥주를 사러 편의점을 찾았다. 그리 멀지 않은. 건어물 가게 몇 개 지나고, 노래방. 주점을 지나니 익숙한 편의점 간판이 보였다. 늦은 시간도 아닌데

거리는 비어 있었고, 지나는 차량도 드문드문.


맥주 한 캔과 어묵 바 하나를 들고 데크로 된

테라스 의자에 앉아 둘러보는데 한 무리의.

아니 3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가 편의점에 들어섰다.

그러다 3명은 내 옆의 의자들을 당겨 5인 좌석

으로 만들고 일행을 기다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내가 이어갔다는 표현을 한 것은 그들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나눈 듯한 말들이, 나에겐 맥락이 없었지만 그들은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기 때문이었다.


"그게 왜 안되냐고? 어차피 혼자 산다면서? 그럼 하면 되지 왜? " " 그게 뭐 맘대로 되나? 아무 나하고 만나서. 그냥 만나기만 사랑인 건가요? 나도 사람 가리는 편이에요. 그리고 아까 이 아저씨가 그랬나?" 하며 편의점 안에서 무언가

한 봉지 가득 들고 온 남자 둘 중, 한쪽을 보면서 말했다. "여자도 마찬가지야. 나이 먹어도 여자는 가슴이 설레는 사람을 만나길 바라는 로망이 살아있어요. 남자만 그러는 줄 알면 큰 착각이지 착각."  주섬 주섬 봉지에서 맥주와 소주 몇 병을 테이블에 올려놓던 한 남자는 멋 적은 듯 그녀를 바라보며 한 마디 던졌다.

" 그게 나라니까? 왜 모르지? 나 잘 봐. 괜찮은 사람이거든? 나도 혼자 살고...."

맥주캔을 그녀 앞에 놓으며 웃는 소리에 일행은 덩달아 크게 웃었다.


마침 따분한 시간에 있던 차에, 행여 곁에 있는 걸 인식할까 봐 삼키는 것도 조용히, 어묵 먹는 것도

살살 씹어가며 그들의 말과 표정들을 티 나지 않게 살피고, 듣고 있었다. 정말 재밌다. 손짓과 말들도.


내용인즉슨. 그들은 노래방 손님들과 도우미 여성 분들이었다. 부르던 마지막 노래가 최백호의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했고, 그중 가사에 "실연에 달콤한 이야 있겠냐만은 "의 대목이 지금 대화의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헉! 나 역시 이 노래에 꽂혀서 종일 부르고 다녔던 기억과 지금도 애정 곡 중 하나로 챙겨 놨는데, 역시 중년을 맞이한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감성으로 변해 가는구나 하는 애틋함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작은 도로 건너편 바다에서 불어오는 비릿한 바다내음인 줄 알았는데, 그들의 가까이 묻어있는 채취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짐작되었다. 여자분들은 조금은 과한 듯한 화장과 향수가 거북하다는 느낌보단, 왠지 정감이 가는 기억 속의 익숙한 향기처럼 편안함을 주었다.

마치 어릴 적 아랫목에 이불 덮인 메주의 향기라 할까? 맡아지는 표면적인 냄새가 아닌, 정서 속에 살아 숨 쉬는 그런 그리움의 채취.


중년이 되면 남녀 가릴 것 없이 지난 젊은 날의 불 같은 사랑을 떠 올려 본적이 더러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마치 장작불처럼 불길이 나무 굵기와 종류에 상관없이 전체를 휘감아 돌아 허공에 기세를 떨치며 재를 털어 올리는 맹렬함과 열정. 그리고 집착에 가까울 만큼의 표현을 했을 때이다. 그야말로 거칠 것 없이 무엇이든 다 태워 주마하는

구애를 하고, 사랑을 하던 그때의 청춘을.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사랑만큼은 깊게 빠지지 못한다면 "실연(失戀)"이란 감정을 좀처럼 만나긴 어렵다. 그냥 만남의 단절일 뿐 고급스러운 아픔을 표현한 실연을 말하기엔 그 깊이와 감정. 그리고 애상(愛想)을 알지 못하는 이별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세상 끝 같은 감정이다. 그러므로. 겹겹이 쌓인 세월을 헤치며 걸어온 중년의 시절에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울 감정이라 생각된다.


중년의 사랑은 어떨까? 모름지기 아마도 백탄 숯 같은 은근함과 지속적인 것이 아닐까? 그것도 아무 목재가 아닌 굴피나무로 만들어진 백탄 숯. 청춘처럼 화려하고 강렬한 불꽃은 없지만 절제가 되지 않아 날아오르는 재도 거의 없을뿐더러, 용도에 맞게 그 쓰임이 다양해지는 백탄 숯처럼, 감정의 향유(享有)를 즐기며 소멸돼도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겸손과 지혜의 사랑법.


중년이 되어서 찾아온 변화 중에 하나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절대 감정의 변화이다. 예전에는 시각을 통해 후두엽에 자극된

즉각적인 아름다움이 대부분이었다면,

지금의 아름다움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원초적인 질박(質樸)한 모습이다. 이런 변화된

아름다움의 기준에 적합한 실연당할 대상을 찾기란 여간해선 어려운 일게다.


희미하게 밝혀진 가로등을 따라 

바람의 언덕길산책했다. 이미 잠은 피곤이 사라지는 소리를 듣고 저만치 달아나 버렸으니. 서울의 이화동 벽화마을이나, 부산의 감천동 마을을 섞어 놓은 듯한 오르막 골목길을, 

누런 골목 등과 달빛을 밟으며 걸었다.

습습한 바람결에 바다향이 묻어오고,

성긴 카페의 불빛이 별빛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편의점 그녀의  말처럼

실연을 로망으로 남겨 놓을 법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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