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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Jun 15. 2020

일사병. 그리고 짜장면 2

나에게 짜장면이란....

흰색과 옅은 밤색의 구슬 모양 플라스틱으로

알알이 꿰어진 주렴을 밀어내고 들어가면

그 소리들이 부딪쳐 들리는 차라라락하는

소리가 너무도 영롱하게 들려왔다. 실제의

소리는 조금 둔탁하게 매끄러운 것이었지만

그 소리는 내가 짜장면을 먹으러 들어갈 때만

들을 수 있는 천국의 문에서 들려오는

천사들의 나팔 소리처럼 아름다웠었다.

  

" 중화반점 " 짜장면 보통은 120원. 곱빼기 150원. 더 많은 양의 왕 곱빼기는 180원.  그 외의 많은 메뉴들이 적혀 있는 대형 전지에 쓰인 메뉴판이 벽에 대충 테이프로 붙여져 있다. 탕수육이니, 팔보채니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의 눈에 들어오는 건 매번 변함없는 짜장면. 보. 곱, 왕이 쓰인 검은 매직 글씨였다. 사실 탕수육, 팔보채는 보이기만 하는 메뉴일 뿐, 먹어보지도 못한 그 맛은 애초의 내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들을 그때 먹어 본 적이 있었다면 장담하지 못할 뻔한 짜장면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그 당시 짜장면의 양은 지금의 곱빼기보다

보통의 양이 훨씬 많았다고 생각하면 청춘들은 이해가 좀 더 빠르리라.

어찌어찌해서 곱빼기를 뚝딱 해 치운 그날부터 나는 짜장면을 사랑하는 어린 거지가 되고 말았다.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고 남들 먹는 걸 쳐다보거나, 행여 흘린 것 을 주워 먹는 사람들을 그때는 거지라고 불렀었다. 물론 주워 먹진 않을 테지만.

날마다 먹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날마다 먹기에는 지금으로 말하면 "특선 장어요리"쯤 생각하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일 년에 많으면 열 번 정도나 먹을 수 있으려나? 그만큼 넉넉지 않은 시절이 었지만, 그중 나의

어린 시절은 그 골이 더 깊은 가난한 집안의 둘째였다. 꿈에도 보이는 짜장면. 교실에서도

나는 그 냄새. 사실 그전에 몇 번 먹었을 땐

그저 맛있다. 또 먹으면 좋겠다 정도였는데,

그렇듯 온 정신을 지배하며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은 일사병.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병원에서 정작 생사의 위기감을 본인만 모르던 어린놈이 어른들의 심각한 걱정 속에 고열에 시달리던 중, 나이의 많고 적음이

아닌 한 인간의 내면의 원초적인 곳에서 처절한 병과의 사투를 벌이는 무의식 속에, 가장 기본적인 본능인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작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병 치료야 알바 아닌 어린 나이지만, 생존본능과 섭생 본능의 절묘한 내면의 접합점. 생존 욕구의 교집합 속, 섭생 욕구의 발현이라 생각하면 꿈결 같은 혼미함 속에서도 먹어야 한다는 욕구가 깊이 작용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때 퇴원을 하고 짜장면을 먹지 못했다면 그 순간의 기억들이 한(恨)으로 각인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게 아니면 그 전의 먹었던 짜장면들과 달리 나에게 각인된 이유를 알기는 어려웠다.


그릇은 연두색 바탕에 흰점이 성글게 박힌 냉면그릇 크기고, 더러 균열이 생겨 까맣게

짜장이 배어들어 마치 갈라진 논 바닥처럼 그

선이 선명하고, 노란 무가 담긴 작은 그릇은  종지보단 조금 큰 누리끼리한 겨자색 그릇이다. 그중 몇몇 개는 불에 그을린 자국을 그대로

가진 채 탁자에 올라온다. 그릇 색이 그런 것은 혹시나 노리끼리한 물이 들어도 별로 표가 나지 않으니 그런 걸까? 하는 생각은 그 뒤로 한참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문득 떠 올랐었다.

식탁을 만지면 약간 끈끈한 감이 있는

청결함과는 멀었고, 탁자 세로 모서리를 따라 배치된 플라스틱 간장 병과 식초병. 그리고 고춧가루가 담긴 통이 있다. 간장병은 빨간

모자를 쓰고 주둥이를 얄팍하게 오므린 모양.

녹물 같은 눈물이 말라붙어 때론 버석 거리기도 했다. 식초병 역시 빨간 모자에 퉁퉁한 몸매를

하고 있지만 녹물 같은 간장의 찌꺼기가 아닌,  따르다 흘린 찌꺼기에 먼지가 붙어 옅은 회색의 띠를 이루며 중력의 힘을 거스를 수없어 아래로, 아래로 그 세( 勢 )를 넓히는 모양새다.

두 개의 대기병(兵)과는 달리 유일하게 고춧가루 통만큼은 작은 티 스푼이 걸려 있고 그 입자가 고르지 못한 굵고 가는 것이 뒤 섞여 있지만 잡히는 끈적함이 없어 가장 청결과 가까웠다.

그리고 그 옆엔 둥그런 나무로 가공된 젓가락이 꼽혀있는 통이 하나 자리한다. 하얀 모조지에 대부분 빨간 글씨로 한글이나 한자로 가게

이름이 인쇄된 포장지 안에는 조금은

거친 듯한 나무젓가락이 들어있다.

종이를 벗겨 양손으로 가볍게 벌리면 열 개 중

서너 개는 한쪽으로 쏠린 모양을 하며 어져, 

먹고 나면 엄지 검지 손가락에 뻘겋게 자국을 흔적으로 남겨 놓았다. 젓가락이 완전 불량이 아니고서는 눈치가 보여서 새로 다른 것을

꺼낼 엄두는 아예   수 없었다.


지금처럼 깔끔한 식당의 내부를 기대하긴

그때의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요리 전문 중국집을 가면 짜장면이 별로라고 느껴지는 것은

맛은 기억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는지.

 

나의 짜장면은 적당히 더럽고, 적당히 불편하며, 적당히 꾸며진 간판과 메뉴판이 갖춰져야

비로소 그때의 맛으로 들어갈 수 있는

준비가 된다. ? 아는 사람은 안다. 이유를.


엄마는 반평도 안 되는 허름하고. 가끔은

시궁창 쥐가 들락거리는 부엌에서 연탄불

아궁이에 칠이 거의 벗겨진 프라이팬에다

대충 쉰 김치에 돼지고기 듬성듬성 썰어 넣고

" 얘 둘째야~하고 불러들여 볶아주신 적이 있으셨다. 그 좁디좁은 곳에 뚱뚱하신 엄마와

내가 앉아 먹기엔 벽에 붙은 낡은 찬장과

구석에 쥐 들어올까 막아놓은 하수구 구멍,

그리고 올라오는 매캐한 연탄 냄새가 여간

불편한 소가 아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기억되는 건 아마도

지금이라면 절대 쉽지 않을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그런 곳을 찾아 가끔은

서울 구석을 돌아다닌다. 골목골목 숨어있는 허름하고도 오래된, 그러면서도 풍만한 아주머니께서 두툼한 손으로 대충 만들어 주는 그런 집. 다행히 청계 8가 뒷골목. 을지로 부속 가게 뒷골목. 동대문 창신시장 한 모퉁이.

그리고 조금 멀지만 동두천 옛 미군부대 옆

길에서 그런 곳을 만났다. 맛도 맛이지만

어린 시절 엄마와 쪼그려 앉아 있던 그 부엌의 감성을 비슷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곳. 맛은 기억 속의 장소이기도 하다.


짜장면. 도대체 무엇이길래 나를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잡아놓고 있는 걸까? 나이 오십이 넘으면 면을 점점 멀리 하게 된다는데....


다음 글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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