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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Feb 11. 2022

눈물 공감, 미싱 타는 여자들

"영화 보러 안 갈래?

너 좋아할 만한 영화가 나왔어. 미싱 타는 여자들"


끝을 알 수 없게 장기화되어 가는 코 시국이 암담하던 차, 그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데 신나서 사전 검색도 안 해보고 팔짝팔짝 뛰면서 갔다.


사람이 많지 않은 독립영화관이라 소극장에 띄엄띄엄 나눠 앉아 마스크를 쓰고 보았다.

기분전환용 유쾌한 영화이길 기대했는데... 나는 참말 무식하다.  '미싱'이라는 타이틀만 보고 바로 알아챘어야지!  


미싱을 타던 여자들... 70년대 그 지독히도 가난하던 시절 우리 언니들이잖아.


마스크를 쓰고 보는 내내 눈물이 흘러내려 마스크가 다 젖고 젖은 마스크와 닿는 피부면이 스멀스멀 가려운 상태가 되어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60년대 후반 생인 나는 미싱을 타본 적이 없는,, 어찌 보면 그 시대 여성치고는 운이 좋았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당연히, 가족을 위해 형제자매를 위해 배움을 포기하고 노동현장으로 침수당하는 많은 언니들을 보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던 세대, 50대 60대 아줌마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좌담식, 독백식으로 이어가는 다큐멘터리 영화.


70년대 도시빈민 소녀공들의 상징적인 노동현장이었던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그곳에서 소녀공으로 일했던 이숙희(70), 신순애(68), 임미경(59) 씨 등이 울고 웃으며 과거의 아픈 기억을 쏟아낸다. 그 흔한 재연, 연기가 없는 이 무미건조한 영화를 감독은 14명의 소녀공과 4TB 하드디스크 3개 분량, 260여 시간에 이르는 인터뷰로 만들었다고 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초등학교를 마친 뒤 곧바로 평화시장에서 일하게 됐던 그 시대의 소녀들.

나보다 많게는 10살 적게는 6~7살 정도 차이밖에 안나는 데도  그녀들의 세상은  엿보는 것만으로도 참 미안했다. 누군가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했던 시기를 우리가 함께 살아왔으니, 나도 그 희생의 수혜자이니까...  


중학교도 가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데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녀공으로 보내져서 하루 종일 몸을 웅크린 채 밤 10시 넘어까지 미싱을 돌렸던 그녀들. 한창 성장할 나이에 웅크린 채 앉아있다 보니 척추가 휘고  있는 골병 없는 골병이 다 들었지만,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 줄 알았던 무지함과 어리석음.  꿈 많은 청소년기에 불공정한 세상의 한가운데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노년기에 다다른 지금까지 이유모를 억울함을 삼켜야 하는 그녀들.


70년대의 그녀들은 '소녀'라기보다는 AI에 불과했다.

기계처럼 노동을 착취당하는 것도 모르고, 그래서 도망칠 수 있다는 것도 몰랐던, 아니 도망칠 구멍조차 없었던 그녀들은, 어느 날 전태일의 죽음을 보았고 그가 외치던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다.


근로기준법에서는 하루 8시간 근무를 외치고 있는데, 그녀들은 8시간이 아니라 밤 10시 이전에만 집에 갈 수 있어도 좋았다. 세상에 대한 억울함과 부당함들에 점차 눈뜨면서 하나 둘 노동교실로 모여, 정식 교육기관에서 받지 못한 공부로 마음의 한을 씻어간다. '7번 시다' '1번 오야 미싱사'로 불리며 살다가 노동교실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회상.





예나 지금에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배부른 사용자들은 유식한 노동자, 공부하는 노동자를 원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이고 뭐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기계를 원한다. 그런데 노동교실에 모여 하나둘씩 부당함과 세상 이치에 눈떠가는 노동자들의 변화와 요구가 불편하자 급기야 노동교실을 폐쇄한다.


1977년 청계피복노조가 운영하던 노동교실이 폐쇄되자 이에 맞서 저항하다 15살, 16살 어린 나이의 소녀 공들은 무자비하게 끌려가서 투옥된다. 투옥된 한 달여의 기간 동안 속옷 반입은커녕 제대로 화장실도 못 가고 굴욕과 냉대속에 억류되었던 지옥 같은 나날을 회상하는 그녀들의 눈에서도,  지켜보는 관람객들의 눈에서도 딱히 이유를 특정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근로기준법을 외치며 부당한 노동환경의 개선을 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 취급을 받으며 법정에 서게 되자 오히려 판사에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느냐'라고 울부짖다가 다시 압박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끔찍한 기억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저 억울하기만 하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까? 평화시장의 저 참혹한 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 열세 살의 한 여공이 있다고 하자. 그 아이의 이름은 시다, 평화시장의 시다이다. 집안이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한창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중학교 1학년쯤에 다니고 있을 나이 이리라.

(『전태일 평전』  2부 '평화시장의 괴로움 속으로' 중)


위 전태일 평전의 실제 모델이었던 여공 시다 신 씨는 무료로 운영되는 노동교실에서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써보았다고 한다.  처음으로 세상을 바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빛'이 너무 좋아 동료와 후배들을 위한 봉사도 그저 즐거웠다고 회상한다. 핍박 속에 다닌 노동교실은  초등학교 3학년을 중퇴했던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검정고시를 거쳐 53세였던 2006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입학하고 대학원에도 진학해 평화시장 여공의 생애사 연구로 2012년 석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러닝타임 1시간 48분이 모두 인터뷰로 구성되었으니 지루할 법도 한데  여자라서, 가난해서, 평화시장으로 투입됐던 소녀공들이 겪었던 삶은 이 사회의 부조리를 여실히 드러낸다.

대학 진학률이 채 10%도 안되고  가난함이 누이의 희생으로 채워져야 했던 70년대.  그러나 그러한 희생이 너무도 당연시돼서 충분한 보상을 기대할 수 없었던 불량한 시대.


만약 그녀들이 부당함에 항거하지 않고 순응하며 살아왔다면 사회변화는 더디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더 오랜 시간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채워져야 했을 것이다. 그때의 기억이 참혹하다 못해 부끄러워서 혹시나 가족에게 누가 될까 봐 마음 편히 털어놓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 40여 년이지만,  재미없을 것 같은 그녀들의 회상이 동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의 마음을 쓰리게 훑고 지나간다.


 미싱을 타던 그녀들에게, 미싱을 타지 않던 우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공범자이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참 행복해진 세상 같다.

그런데 또다시 생각해보면, 그때에 비해 빈부의 격차나 사회 불공정 구조는 더 심화됐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내가 힘들지 않아서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어느 그늘진 계곡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다 지쳐 쓰러진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물을 나와 후대들은 수십 년이 지난 먼 훗날 어느 의식 있는 감독의 영화로 재발견하게 되고 그제야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람이 사는 사회는 항상,

누군가의 눈물과 피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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