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에 홀로 계신 86세의 친정엄마는 심심하실 때마다 전화를 걸어오지만, 반대로 나는 항상 여유가 없다.
특히나 전화 문의와 상담이 많은 직업이다 보니 친정엄마의 전화를 살갑게 응대해드릴 수 없었고, 그래서 늘 '엄마 나 지금 바빠. 좀 이따 전화할게' 라고 끊은 뒤에 다시 전화하는 것도 건성 넘기기 일쑤였다. 계약 중이거나 손님 응대 중일 때는 그나마 전화도 안 받고 패스했다.
물론 나라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늘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다음엔 안 그래야지'라고 자체 반성을 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반성은 딱 그 순간뿐이었다. 아마 편한 친정엄마라 더 그랬을 수 있다. 반면 시어머니 전화는 칼 같이 받고 칼 같이 걸었다.
그런데 마침 주말 저녁 배부른 휴식 시간에 걸려온 전화라 나는 "오늘은 착하게 받아야지"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평소보다 나긋나긋한 딸 목소리에 기운이 나셨는지 용건을 풀어놓았다.
"요즘 노인정에서 선생님이 공부를 가르쳐줘. 10명이 모여서 공부를 하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어. 옆집 순천댁은 이제 겨우 자기 이름 쓰는 거 공부하는데 나는 그런 건 쓸 줄 안다고 다른 걸 시켰어"
엄마는 그 흐릿한 시절에도 국민학교를 졸업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한글을 읽고 쓰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하다.
"다른 거 뭐?"
"편지를 써오래. 그래서 내일까지 숙제인데 막내 네가 좀 써주면 안 되겠냐? 너는 글을 잘 쓰니깐 네가 대신 써서 주면 엄마가 쓴 것처럼 선생님한테 갖다 주게"
아이고......
글 좀 쓴다고 뻑하믄 여기서 뭐 좀 써주라 저기서 뭐 좀 써주라 해서 잡일만 많고 귀찮아 죽겠는데 이젠 뭐 노인정 80~90대 할머니들 편지 숙제까지? 아이고 내 팔자야..
"엄마 무슨 편지 숙제를 대신해 주래. 편지 쓰는 건 별거 아니니까 엄마가 해봐. 숙제는 직접 하는 거지... "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편지를 써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쓰라고"
엄마는 나름 심각했다. 할머니들한텐 요것도 근심거리인 모양이군...
"편지는 말이야. 옛날에는 전화가 잘 없었잖아. 집 전화는 있어도 휴대폰은 나중에 생겼잖아. 그러니깐 멀리 있는 사람한테 하고 싶은 말을 쉽게 할 수 없었어"
"그랬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모아서 종이에다 써서 우체부를 통해 보냈던 거야. 지금은 수시로 통화를 하니깐 할 말이 별로 없지만, 그땐 꼭 해야 할 말을 모아서 정성스럽게 써서 보낸 거라고. 그러니깐 그냥 말하듯이 쓰면 돼. 하고 싶은 말을 쓰면 돼. 별거 아냐"
만약 휴대전화가 없다면 엄마는 나한테 이렇게 자주 전화할 수 없었을 거잖아. 지금이야 수시로 전화통화를 하니깐 특별히 못한 말이 없지만, 생각해 봐. 전화가 없다면 얼마나 답답해. 그러니깐 편지라도 쓴 거였지..
나는 10여 년 전 갓 글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딸과 아들에게 하듯 나름 쉽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엄마는 응 응 그렇지 그렇구나라고 맞장구를 치며 착한 학생처럼 들었다.
"그러니까 말하듯이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봐. 그게 편지야"
"말하듯이 하는 거면 그냥 말로 하라고 하면 되지 왜 숙제를 내준다냐. 그래서 잘못 쓰면 동네사람들한테 창피지"
그렇구나... 노인정에 10여 명의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누구는 생전 처음 펜대를 잡고 이름을 쓰고, 또 누구는 단계에 맞게 편지를 쓰는데... 평소 자식자랑 손주자랑이 자존심이고 유일한 대화거리였던 노인분들이라 이왕이면 편지도 잘 써서 어깨에 힘 좀 주고 싶으신 거다.
"창피 아냐. 편지는 그냥 전화로 말하듯이 쓰면 돼. 한번 써보셔"
끙... 네가 대신 써주라니까..
엄마는 어린아이 같이 자꾸만 대신 써달라고 조르셨다. 아무리 말로 쉽게 설명했어도 생전 처음 써보는 편지, 노인정 숙제가 영 자신이 없나 보다. 이걸 어떻게 빠져나가지? 머리를 굴리던 나는 말했다.
"음... 엄마! 공인중개사가 요즘은 법으로 대서 대필을 못하게 되어있어. 남의 것을 대신 써주는 거 그런 게 법으로 걸린다고. 나도 공인중개사잖아.. 그래서 대필 못해. 엄마가 직접 써"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박장대소를 하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공인중개사 대서 대필이 왜 거기서 나와. 푸하하하.
법을 운운하자 엄마는 급 체념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쓰는지 한번 알려줘 봐"
"음.. 누구한테 편지를 쓸건대?"
"너한테 쓰지"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줄줄 말을 이었다.
"음.. 내 이쁜 막내딸아 밥은 잘 먹고 다니냐? 김치 떨어졌으면 말해라 또 담아서 보내줄게. 그리고 우리 이쁜 손녀 현이는 공부 잘하고 있지? 요번에 합격하면 할머니가 용돈 보내준다고 해라. 뭐 이런 식으로 쓰면 돼"
엄마는 열심히 듣는 눈치시더니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휴일 내내 뒹굴거리면서 가끔 엄마의 편지가 생각나 혼자 웃었다. ㅎㅎ 무슨 편지를 대신 써주래. 노인정 숙제가 별거라고 ㅎㅎㅎ
그리고 그날 밤 친정엄마가 다시 전화를 하셨다.
"너는 법에 걸리니까 대신 편지를 못써준다고 해서 둘째(언니)한테 전화했더니 바쁘다 하더라. 큰애한테 전화했더니 뭐 그런 걸 쓰고 말고 하냐고 못 쓰겠으면 그냥 쓰지 말라더라. 그런데 어떻게 숙제를 안 하냐. 순천댁은 이제야 자기 이름 쓰고 있는데 나는 그래도 글씨를 쓸 줄 아니깐 편지 써오라는 거 아니냐. 그러니깐 잘 써가지고 가야지"
"그래 엄마 숙제는 원래 꼭 해가야 하는 거야. 그래서 편지는 썼어?"
"오냐. 썼지. 네가 어제 가르쳐줘서. 네가 가르쳐준 대로 편지숙제를 했는데 잘 됐는지 한번 들어봐라"
"어. 읽어보셔"
나는 이틀 동안, 아니 노인정 선생님이 언제 숙제를 내줬는지 잘 모르겠지만 숙제를 내준 순간부터 고심했을 엄마의 생애 첫 편지내용이 궁금했다. 내가 예시로 불러준 대로 쓰셨을까? 기대감에 차서 집중자세를 취했는데... 엄마가 편지를 읽으셨다.
OOO에게 (내 이름)
OO아(내 이름) 바쁘다고 전화도 안 하고 전화해도
또 바쁘다고 안 받지 말고 잘 받아라.
현이가(내 딸) 시집가서 똑 너처럼 전화 잘 안 하면 좋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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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엄마의 전화.
"편지 숙제는 나랑 지윤이할매랑 딱 두 명만 해왔는데선생님한테 편지 잘 썼다고 두 번이나 칭찬받았다. 내가 누구 엄만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