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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Aug 03. 2020

단돈 10만 원

믿지 못하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


어둠이 낯선 손님처럼 내려앉던 어느 밤.
이래저래 하다 보니 퇴근시간을 넘겨서까지 사무실에 있었다.
내친김에 좀 더 버티다가 아예 아이 학원 끝날 시간에 나가서  픽업해 가야지 하고 있는데,
어두운 창밖에서 누가 기웃기웃 하더니 문을 밀고 들어왔다.

아이고.... 몰라보게 야위셨네....
얼마 전까지 아파트 노인회장을 하셨던 윤영감님이시다.

"오늘은 왜 늦게까지 있네?"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금방 퇴근하기는 틀렸네.

"오늘 집 보러 온 사람 없었어?  
나 아는 이가 집 구한다길래 내가 이 부동산 사장 잘 아니 꼭 글루 가라 했는데.."

손님이 몇 분 오긴 했는데 그런 분은 없었다고 해도  '아니야~ 왔을 거야 내가 여기로 가라고 했어. 아무튼 누가 오긴 왔지?  내가 보낸 손님이야.' 하셨다.  

잠시 말이 끊겼다.

그런데 갑자기 처연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 내가 젊을 땐 여기저기 돈도 잘 쓰고 다녔는데
나이 들고 또 요새 간에 이상이 생겨서 치료받으러 댕기고 부쩍 아프니까 아무도 돈을 안 꿔줘.
돈 좀 빌려달라 하면 못 받고 떼일 것처럼 생각되나 봐.  그래서 늙고 병들면 더 서글퍼지나 봐. 내가 이래 봬도 한때 좀 잘 나갔어? "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걸까.

휴.... 갑자기 깊은 한숨을 쉬신다.
.
" 좀 전에 슈퍼에서 담배 좀 외상으로 달랬더니 안된다고  손에 든 담배를  채가더라고........"

그러시더니

"아까 낮에 지나갈 때 보니 사람들 많던데
복비도 많이 받았겠네? 나 10만 원만 빌려주... 담주 화요일에 줄게"

아... 그래서 들어오셨구나...

윤영감님이 돈을 빌리러 오신 건 처음이 아니다.

몇 개월에 한 번씩? 잊을만하면 오셨다.

뉴욕에 살고 있는 딸이 용돈을 보내주는데 아마 날짜 대중이 없나 보다. '딸이 돈 보내주면 줄게' 라고 빌려갔다가 한참 지나서 미제 초콜릿과 함께 돌려주신 일이 몇 번 있었다.

10만 원, 20만 원, 많아도 30만 원을 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가다 보니 빌려드린 돈을 일일이 기억했다가 돌려받았는지 말았는지 체크하기도 그래서... 몇 번 지난 후에는 현금이 없다고 털어버리기도 했다.  그 뒤로는 다른 데서 빌려 쓰시는지 아니면 딸이 용돈을 제때제때 잘 보내주는지 한동안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런데 다 저녁때 다시 돈 이야기 하러 들르시기는 얼마나 겸연쩍으셨을까... 또 현금이 없다고 할까 봐 낮에 손님이 많더라는 이야기까지... 외상 담배 사려다 빼앗기셨단 소리는 아니 들은 만 못했다.

그래서 지갑에서 5만 원권 2장을  빼서 영감님이 앉은 소파까지 걸어가는 몇 초 사이에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 그동안 금방 갖다 줄 것처럼 하고  몇만 원씩 몇 10만 원씩 빌려갔다가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 다시 빌려드리기 시작하면 앞으로 또 수시로 들르시면 어떡하나..

'아 그런데.. 아프시다는데....
그래.... 이제 너무 연로하셨으니 그냥  마지막 용돈 드렸다고 생각해야지...'

하고 건네드렸다.

꼭 갚겠다고 약속한 다음 주 화요일이 지나고  또 그 다음 주 화요일도 지나고....

영감님은 오지 않으셨다.

- 에이 그래 받으려고 드린 돈 아니었잖아
어차피 용돈 드렸다 생각하자 했으니깐...

- 10만 원 빌려달라셨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 이거 못 갚으시면 앞으로 빌려달란 소리도 안 하실 거 아냐  오히려 잘 됐지 머.

문득문득 영감님과 10만 원 생각이 날 때마다 애써 웃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10만 원이 아까웠나보다.

그리고

3주가 지난 어느 날  오후,  혼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창을 똑똑 두드렸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윤영감님이 빨리 나오라고 손짓하셨다.  나갔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내손을 부여잡고 뭔가를 쥐어주셨다.  5만 원권  2장이었다.

" 너무 늦었지? 직원이나 손님들이랑 같이 있을 때 오면  '저 노인네는 밤낮 돈만 빌려가네'라고 할까 봐 이제 왔어.  고마워 "
.......
.......


믿지 못할 것이  많아진 세상이지만 사람을 믿는다는 게 바로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닌지,

누군가를 못 믿는 순간 가장  불행해지는 건 바로 '나'가 아닌지...

누군가를 믿을까 말까로 혼자 갈등했던 순간들은 그동안 또 얼마나 많았는지....
나의 어리석고 초라한 잣대로 다른 사람의 깊은 마음과 인생을 저울질한 우는 또 얼마나 많이 범했는지....  


단돈 10만 원으로 내가  윤영감님의 남은 인생을 초라하게 격하시킨 건 아닌지... 5만 원권  2장을 받아 든 손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다음에  또 빌려달라고 오시면 밝은 얼굴로 민망하지 않게 잘 빌려드려야지~ 슈퍼에서 외상 담배 사려다 빼앗기는 일 안 당하시도록  내가 편하게 빌려 드려야지.

그런데
그럴 기회가 없었다.


몇 달 후 우연히 길거리에서 윤영감님 사모님을 만났다. 윤영감님 잘 지내시냐고 요즘 토옹 안 보이신다고 안부를 여쭈었더니

두 달 전에 가셨어... 간암 말기셨거든...


후회는  쓸데없는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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