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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Aug 05. 2020

재수 예찬 -   어머니는 왜 점수가 안 궁금하세요?

재수 시켜볼만 하더라~

재수는 절대 안된다.
최선을 다하고 성적에 맞춰 대학을 가라!

우리 (남편과 나) 입장은 단호했다.  대학이 인생의 최종 목표가 아니고 재수한다고 특별히 달라질 게 없으니
성적에 맞춰 가고 재수할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이나 찾아보라는 것.

아이들도 '우리 집은 재수는 안된다' 것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대신에 과외든 뭐든 원하는 건 시켜주었는데, 어느 날 수학을 50만 원에 과외받는 딸의 성적표를 보니 눈 감고 찍는 수준이었다. 몰래 숨겨둔 성적표를 확인한 날,  조기 퇴근하고 학원 앞으로 가 딸아이를 불러냈다. 인근 식당으로 가 한우 특수부위를 구워주면서 말했다.

이거 먹고 설빙 갈까? 아님 또 먹고 싶은 거나 사고 싶은 거 있음 말해.

딸은 낄낄낄 신이 났다.

- 오늘 무슨 날이에요? 계약 많이 하셨어요?
- 아니야 그냥 엄마 돈으로 사줄 때 뭐든지 먹어.

나중에 네 돈으로는 쉽게 먹기 힘들 거야. 우리 세대랑 너네 세대는 달라서 열심히 일해도 먹고 쓰는 게 훨씬 못할 수 있어. 취업기회가 부족하고 물가상승률이 어마어마하잖아. 그러니 엄마가 사줄 때 많이 먹어둬.  그리고 수학 과외는 끊자. 그냥 지금처럼 눈 감고 찍어. 꼭 대학 안 가도 돼. 공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찾아봐.

자글거리는 특수부위 위로  딸의 닭똥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 맞아요? 너무 잔인해...

공부하지 말라니까 비로소 딸은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수능점수로  맞춰갈 대학은 딸의 기대에도 못 미쳤다. 재수는 안 하기로 약정된 상태니 등록금까지 다 납부했는데,  딸은 엄마 아빠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겼다. 내용은 구구절절이었으나 핵심은 '한 번만 기회를 달라!'였다.


등록금을 환불받고 재수생활이 시작됐다.
학원 가는 첫날,  아침 7시에 나간 딸은 3시간 후 울면서 전화했다.

"오늘 하루 쉬고 내일부터 학원 가면 안될까요? 엉엉..."

학원 가는 버스 타려고 정류장에 나가니 대학 가는 친구들이 등교하느라 몰려나와서 숨고, 한참 후  다음 차 기다리니 오는 차마다 가득가득 만차라서 또 놓치고,  결국 학원 가기엔 너무 늦어버려서 딸은 상가건물 뒤에 앉아 울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뭔가를 열심히 하는데, 나는 한 바퀴를 되도는 낙오자가 됐구나.'

그리고 딸이 변했다.

아침잠 많은 엄마가 눈을 뜨면 학원 가고 없었다. 밤 11시에 돌아와도 밤늦도록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다.
휴일에는 좀 쉬래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나갔다.  학교 다닐 때나 그럴 것이지 뒤늦게 떠난 버스 쫓아간다고 애쓰는 딸이 안쓰러워, 주말에는 남편이 학원을 태워 주고 태워 왔다. 어느 날 남편이 해외출장을 가면서 '요번 주말에는 꼭 일찍 일어나서 학원 데려다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눈 떠보니 이미 가고 없었다.


딸한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딸 대단하다. 훌륭해. 하루 쉬어도 되련만. 그런 의지라면 우리 딸 나중에 무슨 일을 해도 잘할 거야.

딸은 울컥했다며
'엄마 고마워요.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 메시지 평생 간직할게요.'라는 답문을 보내왔다.
변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장실에 앉아 일 보고(?) 있으면 문밖에 서서 말했다.

"엄마 문제집을 천천히 풀고 두 번씩이나 풀었는데도... 죄송해요. 문제집 한 권만 더 사주시면 안될까요?"


황당해서... 그런 건 얼마든지 사 줄테니 아껴 풀지 말아라~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고 호소해도(?) 끝까지 면목없어 했다.

가을이 되어 수능을 한 달 앞두고 학원에서 학부모 면담 요청이 왔다.  학원에 가서 이○○ 엄마입니다.  '면담 왔습니다'  했더니 지나가던 남자 선생님이 아? ○○이 어머니세요?  저쪽으로 오세요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님이 자료를 뒤적뒤적하더니
6월 평가에는 성적이 이랬고요~  9월 평가에는 어쨌고요~설명을 하길래

선생님.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죠? 안 하셔도 되는데요~  했더니
아 그럼 ○○이가 지원 가능한 대학은..

그래서 다시 말했다.

저는 그런 이야기 들으려고 온 게 아닌대요~
 
선생님 눈이 동그래졌다.
점수가 안 궁금하세요?  어느 대학이 가능한 지도요?

네 안 궁금해요. 아이가 알아서 열심히 하겠지요
제가 안다고 해서 도움이 되겠나요  공부는 자기가 하는 거지요.

선생님은 잠시 나를 빤히 쳐다봤다

학원 생활 10여 년 만에 점수가 안 궁금하다는 부모님은 처음입니다. 모두 그걸 가장 궁금해하시죠~
그럼 어머니는 뭐가 궁금하시나요?

저는 우리 아이가 학원에서 밝게 잘 지내는지,  공부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닌지,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게 궁금해서 왔습니다.

선생님이 말했다.
저는 ○○이가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열심히 나와 공부하길래  부모님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우리 학원 선생님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걸요?

휴일은 자율인데도  딸아이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  딸 한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휴일 당직을 해야 했단다. 그래서 대학밖에 모르는 지독한 부모님들 탓에 아이가 저러는구나 생각해서 상담시간에 만나면  성적과 진로에 대해 관심이 지대할 걸로 알고 준비했다고 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다른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 혹시 ○○이 어머니이신가요? 면담시간이 됐는데 왜 안 오시나 했더니 김샘이 모시고 갔다길래.."

담임선생님은 따로 있는데 ○○이 엄마라는 소리를 듣고 옆반 선생님이 끌고 가 상담해준 거였다. 딸아이에 대해 선생님들의 관심이 그만큼 컸다고 한다.

상담이 끝난 며칠 후 퇴근길에 들러  픽업해 오는 차 안에서 딸이 말했다.

오늘 국어시간에 국어 선생님이 말했어요.
이번에 학부모 상담을 하면서 처음으로 공부가 아니라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만났대요.
그 말씀을 하시면서 자꾸 저를 쳐다보시길래 직감적으로 그 훌륭하신 어머니가 혹시 우리 엄마를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재수시켜주셔서 감사해요 엄마!


두 달 후 수능을 마치고 고사장을 나온 딸의 표정은 너무나 밝았다.  최선을 다했으니 원하는 대학에 못 가도 후회는 없다고 했다.(지맘대로...)

그리고 역시 예상대로 원하는 대학에 못 갔다. 그러나 1년전 수능 때랑 다르게 너무나 당당했고, 성적에 맞춰 선택한 대학도 만족해 했다. 대학생활도 즐겁게 하고 있다.

재수는 안 시킨다는 게 철학이었지만 재수가 나쁜 것은 아니더라. 재수하면서 성적이 크게 나아진 건 아니지만 사람이 많이 컸다.  남들은 직진할 때 한 바퀴 돌아오는 재수생활이 딸의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재수도 시켜볼 만은 하겠다.  

내 딸은 재수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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