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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개사의 천태만상 현장일기(21)

순간의 선택에 끌려다닌 8년

by 양콩

몇 개월 전, 주변의 빌라 소유자가 매매의뢰를 했다.

그러나 당시 사정상 빌라 매매가 쉽지 않다 보니 한 번도 손님을 붙이지 못했고

어느 날 물건이 전세로 바뀌었다.


소유자가 제시한 전세가는 보증보험 한도를 조금 넘어섰기에 하향 조정을 요청했더니 순순히 조정해 주었다.

전세 물건은 귀한 시기라 바로 계약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하루를 고민하더니 전세를 거둬들이고 최저가 급매로 변경하였다.


여러 번의 고민 끝에 최저가로 조정한 급매다 보니 매수인이 바로 붙었고, 또 한 번의 금액 조율을 거쳐 계약 시간이 잡혔다. 집을 볼 때마다 비번을 받아서 보았기 때문에 소유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어떤 사람일까 은근히 궁금했다. 매매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다시 매매로, 그리고 최저가에서도 흔쾌한 금액 조정.


'매도인 마음이 또 바뀌지는 않았을까, 매수인은 안 잊어먹고 오려나' 혼자 걱정하고 있던 차에

모두 10분 전에 도착했다.


매도인은 의외로 젊고 인상 좋은 남성이었다.

등기부를 보니 86년생이고 경매로 취득. 집마다 나름의 역사와 사연이 있기 마련이지만

'젊은 사람이 빌라를 경매받아 입주했네?' 라고 생각하던 찰나, 매도인이 갑자기 매수인을 향해 말했다.


"이 중개사님이 제 신혼집으로 이 집을 소개해주셨어요."


'내가 중개했다고? 경매로 낙찰받아놓고 왜 저렇게 말하지?'


혼자 갸우뚱하면서도 되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표정이 읽혔는지, 계약서 작성이 끝나고 매수인이 돌아간 뒤에도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과거를 털어놓았다.






8년 전, 내가 낸 빌라 전세 광고를 보고 방문하여 이 집을 보았다고 했다.

당시 신축한 지 얼마 안 된 빌라라 마음에 꼭 들었고 부모님께 계약의사를 밝혔더니,

'아들이 신혼살림 차릴 집이라 한번 보고 싶다' 하셨단다.


퇴근 후 부모님과 함께 빌라 단지를 둘러보다 마침 귀가하던 집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전날 집을 워낙 꼼꼼히 보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대화를 나누었던 터라 서로를 알아보았고,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살펴본 후 계약 의사를 주고받았다.


그가 나에게 전화해 계약 시간을 잡겠다고 하자, 집주인이 말했다.


"굳이 중개사를 낄 필요가 뭐 있어요. 전세인데… 결혼 준비하느라 들어가는 돈도 많을 텐데

중개수수료도 아낄 겸 우리끼리 계약합시다."


그는 부동산 계약이 처음이라 중개사 없는 계약에 불안함을 표했지만,

집주인은 '아는 지인이 중개사무소에서 일하니 그 사람에게 부탁하겠다' 라고 거듭 제안했다.


이틀 후, 지인이라는 사람과 함께 빌라에 모여 계약서를 작성했다.

전세계약 시 담보대출이 있었고, 전세 잔금 후 1주일 뒤에 일부 상환하는 조건이었다.

당시엔 담보대출을 남기는 대신 전세금을 저렴하게 하는 계약이 나름 성행했기에,

신혼부부는 깨끗한 집을 저렴한 전세로 입주할 수 있는 게 너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1주일 후, 집주인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상환 기일을 차일피일 미루다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압류며 가압류가 잇따라 늘어나며

돌이키기 힘든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는 근심과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 임대인을 찾아 온 동네를 헤매었지만, 임대인은 이미 잠적한 뒤였다.


결국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그는 길거리에 내쫓길 상황이 되었다.

고민 끝에 선순위·후순위 채권을 모두 떠안고 시세보다 비싸게 낙찰받아 지금까지 살았다고 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답답한 마음에 몇 차례 중개사무소 앞까지 찾아왔지만,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섰다고 했다.


"이 집을 보러 처음 방문했을 때, 중개사님 정말 바쁘셨어요.

사무실에 손님도 많았는데, 주변 입지까지 꼼꼼히 설명해 주시며 두 시간 넘게 상담해 주셨지요.

그런데 중개보수 아끼자는 집주인 말에 혹하여 따로 계약했던 게 죄송해서

다시 찾아오지 못했어요."


그러나 나는 그가 기억나지 않았다.

숱하게 지나간 많은 손님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는 내 사무소 앞길로 출퇴근을 하며, 미안한 마음에 괜히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지나쳤다고 했다.

혹시 눈이 마주쳤더라도, 나는 그가 나를 배제하고 계약을 체결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결국 전세사기 치고 잠적한 집주인을 찾아 헤매다 비싸게 경매받아 지금껏 살았지만,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집에 정이 붙지 않아 결국 팔고 나가는 거라고 했다.


그가 돌아간 뒤, 나는 고민에 빠졌다.

8년 전 그 전세계약을 내가 직접 체결했더라면, 과연 그의 전세보증금은 안전했을까.


잔금 시 담보대출을 상환·말소하기로 약정된 임대차의 경우,

중개사는 임대인과 동행하여 대출금 상환을 확인한다.

어떤 경우엔 상환 금액을 미리 확인해 그 금액만큼 공제한 뒤 지급하고, 직접 상환·말소를 진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집주인은 애초부터 상환할 의지조차 없었다고 추정된다.

전세보증금을 탈취할 목적이 처음부터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운 좋게 전세사기 계약에 연루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아니면, 그가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내가 어떻게든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큰소리쳐야 할까

며칠 동안 머릿속이 복잡했다.


부동산 시장은 예측 불가능한 돌발 사고가 많은 곳이다.

흡사 전쟁터와 같아서, 순간의 유혹에는 늘 신중해야 한다.

누군가가 던진 달콤한 당근 뒤에는 훨씬 큰 리스크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는 집주인의 감언이설에 속은 대가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지만,

끝내 나를 배제하고 계약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버리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난 지금에서야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그런 집주인을 만나게 된 계기는,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잔금일 날 그는 홀가분한 표정이었고 모든 일처리를 깔끔하게 처리해 준 뒤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떠나갔다.


8년 전 그가 내 사무소를 방문하면서부터 겪은 일들에 대해서는 안타깝고 미안할 뿐이지만,

오늘 이 집을 떠나면서부터는 그에게 아주 좋은 일만 생길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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