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계절 따라 지켜보아야 한다
점심을 먹고 앉아있는데 젊은 남녀가 들어왔다.
"집 좀 내놓으려고요.."
웬만하면 몇 동 몇 호에 누가 사는지 다 아는 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110동 4층이란다. 낯설어서 집주인과 관계가 어찌 되느냐 물었다. 머뭇머뭇하더니 인테리어 업자라고 했다.
110동 4층 소유자를 안다.
거래한 적은 없는데 다른 동 주민이 그 집에 돈 받을 것 있는데 돈을 안 준다며 싸게라도 팔아달라고 내놓은 적이 있었다.
나는 소유자가 집을 내놓아야 팔지 채권자가 팔아달란다고 팔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며칠 후 소유자를 데려왔다. 곱상하게 생긴 40대 초반의 여성분.
그녀는 집을 싸게라도 파는데 동의해 달라고 다그치는 채권자 사이에서 밝게 웃으며 말했다.
"돈 곧 나와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믿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녀가 돌아간 뒤에, '젊은 사람이 안 됐는데 남의 집 후려쳐 팔게 하지 말고 조금 기다리시라' 고 했다.
아마 나는 꼭 그녀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남의 집을 급매로 팔려했다면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개보수를 받을 목적으로 중개업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중개보수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돈거래는 그들만의 협의였고, 채권을 회수하기 위해 부동산을 압류하거나 처분하게 하려면 법적 절차를 거쳐야지, 중개사가 그 돈을 받도록 해주기 위해 누군가를 길거리로 내모는 일에 동조할 수는 없다.
자기편을 들어줬다 싶어 고마웠는지, 110동 4층 소유자 그녀는 그 후로 오다가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살갑게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밝은 표정을 보고 모든 것이 잘 해결됐나 보다 했는데...
두세 달 전에 매매 물건을 찾는 손님들이 와서 집을 보여주는데 그들이 '110동 4층이 올수리 돼서 나왔던데 그 집은 왜 안 보여주냐'고 물었다. 그 집 물건이 접수된 적이 없었다.
어? 그 집이 매물로 나왔나? 해서 여기저기 훑어보니 인근 아파트 중개사무소에 나와있길래 물어봤다. 얼버무리면서 '세입자가 계속 산대요'라고 해서 그런가부다 했다.
그런데 오늘 방문한 인테리어 업자들 이야기 들어보니 스토리가 버라이어티 했다.
110동 4층 집주인이 어느 날 인테리어 업체에 전화해서 집을 최고급으로 리모델링 해달라고 했단다. 짐은 미리 뺄 테니 싹 갈아엎어달라고.
그래서 보일러 배관부터 해서 집 기초공사를 거의 다 다시 하다시피 해서 공사비가 일반 인테리어의 세 배 이상 들었다고 한다. 보통 거액의 인테리어 공사를 하게 되면 시작하기 전에 착수금조로 계약금을 받는데 10원 한 푼도 못 받았단다.
소유자가 오늘 준다 내일 준다 하면서 차일피일 미뤘기 때문이다. 그 업체는 원래 착수금 수령 안 한 상태로는 공사를 시작 안 하는데, 그럴듯하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 데다 나름 알아보니 10여 년 넘게 살던 집주인이고 아이들도 다 인근 학교에 다니길래 설마 돈 떼먹겠어...라고 위안 삼으며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공사가 끝난 후에도 돈을 줄 생각을 안 했다. 이 주인 여자가 중국교포인데 교묘한 거짓말로 공사대금 주는 걸 차일피일 미루더니 심지어는 위안화로 준다 해서 그러라 했더니, 환전해 주겠다 하며 또 미루다가 결국 한 푼도 못 받았는데 공사 자재비만 1억 2000만 원 넘게 들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유치권 행사하고 소송까지 해서 승소했는데도 줄 돈이 없다 해서 결국 집으로 대물 처리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집도 담보대출이 풀로 있다 보니 공사비를 건지지 못할 상황이라고...
인테리어 업자는 장황스토리를 펼치고 나서 깊은 한숨을 쉬더니, 시세보다 1억 원 더 올려서 팔아달라고 했다. 그래야 공사비며 소송비 건진다고...
인테리어 업자가 하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애초 공사비 줄 돈도 없으면서 왜 배관까지 다 바꾸는 최고급 인테리어를 시킨 건지... 차라리 일반적인 인테리어만 해서 집을 팔았으면 그래도 얼마라도 남겨서 이사 갈 수 있었을 텐데... 이해가 안 됐다.
심지어 유치권 행사 중이라고 여기저기 붙여놓은 딱지도 초등학생 딸을 시켜서 매번 다 뜯어냈다고 한다. 그리고 단지 내 중개사무소에 안 내놓고 좀 떨어진 중개사무소에 집을 내놓은 건, 아파트 주민들이 모르게 매매계약금만 받고 '튈'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곱상하고 선하게 생긴 모습이 눈에 생생했다.
말도 순하고 어눌하게 해서 누굴 사기 칠 걸로는 안 보였는데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인테리어 업자가 소송을 시작하자 동네 사람들이 어찌 알고 전화가 무수히 왔었는데 돈 떼인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단다.
예전에 내가 'OOO님이 참 괜찮은 사람 같아요'라고 하자 누군가가 말했다.
"사람을 그렇게 쉽게 평가하지 말아라. 사람은 사계절을 두 번 겪어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
뭘 그렇게까지... 까다롭네~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엔 그 말이 정답이다 싶다.
옳은 말 좋은 말을 많이 해서 정말 옳은 사람 좋은 사람인가 보다 믿었는데, 어느 순간 보면 그 모든 것이 포장이었던 경우가 있다. 정말로 알게 된 지 사계절 안 겪은 사람들은 그것이 포장인지 실체인지 판가름할 수가 없더라.
햇살 좋은 봄에 핀 예쁜 꽃, 싱그러운 초여름의 무성한 신록, 풍성한 가을의 오색 단풍만 보지 말고,
말라비틀어진 낙엽이 지천에 깔리고 한겨울 앙상한 가지만 남아 맹추위를 이겨내는 걸 두어 번은 겪어본 후에야, 그 나무가 앞으로 더 많은 풍파를 함께 견뎌낼 기둥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 그 곱상한 아주마이가 돈도 없으면서 인테리어 업자한테 1억 2000만 원어치 공사를 시키고 배 째라 할 줄 알았겠나~
사람이 무섭다.
남은 인생,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한테 상처받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걸로 쳐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