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연인가 봐요
여름휴가 마지막 날.
4시 반으로 병원 검진을 예약해 뒀는데 그날따라 전화가 유난히 많았다.
'휴가니까 안 받아야지…' 결심했지만, 중개업은 전화기에 매달려 사는 일이니 마음처럼 쉽지 않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심지어 잠결에도.
한 번은 새벽 4시.
눈도 제대로 안 떠진 상태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받았더니 웬 남자가 다급하게 물었다.
"00 아파트 빨리 입주 가능한 매매 있나요?"
"네 있습니다…"
"내일 오전에 볼 수 있나요?"
"네… 지금은 다들 자는 시간이니 아침에 통화드릴게요."
10분 후 다시 전화.
"그 매매를 전세로 돌릴 수는 없나요?"
급한가 보다 싶어 아침에 눈뜨자마자 소유자에게 확인한 뒤 전화를 했더니 이번엔 남자가 안 받는다.
문자를 보내니 이런 답장이 왔다.
"어제 야간 근무라서 전화한 거고요. 지금은 퇴근해서 자는 중이라… 나중에 다시 전화드릴게요."
본인이 야간 근무라서 모두가 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 중개사는 늘 깨어서 업무해야 하는 사람이라 생각한 걸까.
그 후 5년이 지나도 그 남자의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아무튼 휴가인 데다 검진까지 있으니 오늘만큼은 전화 안 받기로 했는데,
막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걸려온 전화. '거절' 누른다는 게 손이 미끄러져 통화가 연결됐다.
한방 광고를 보고 전화했다는 남자. 오늘 꼭 보고 싶다며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 집은 이틀 뒤면 세입자가 나가며 공실이 될 예정이라 마음이 쓰였고, 이상하게도 '보여줘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결국 마음을 접고 6시 반으로 약속을 잡았다.
그날은 갑작스러운 집중호우로 운전하기조차 무서울 정도였는데, 사무실에 도착하니 우산을 쓴 채 문 앞에 서 있는 남자. 빌라를 훑어보고는 '계약하겠습니다'라며 졸졸 따라왔다.
아… 집에 가고 싶다.
비는 점점 더 쏟아지고, 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사무실 문을 열었다.
불도 켜고 에어컨도 켜고 컴퓨터도 켜고...
'빌라 월세 하나 계약하겠다고 휴가 기간에 병원에서 이 비를 뚫고 달려온 너도 참…'
등기부를 출력하고 임대인 할머니께 전화드린 뒤 계약금 계좌를 건넸다.
남자가 하나하나 번호를 눌러 금액을 입력하려는 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어디라고요? 아, OO부동산요? 세입자가 연락됐다고요?"
그는 잠깐 나를 힐끗 보더니 통화를 이어갔다.
"안 되겠는데요. 제가 연락이 안 돼서 돌아다니다가 다른 부동산에서 집 보고 지금 계약금 보내는 중이에요.
제가 계약한다 해놓고 가버리면 예의가 아니잖아요. 인연이 아닌가 봐요.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고 그는 다시 계좌번호를 누르면서 내게 말했다.
"사실 제가 들어가고 싶은 집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이제야 세입자가 연락돼서 볼 수 있대요.
그런데 여기 계약한다 해놓고 일어서는 건… 중개사님한테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때 그냥 고개만 끄덕였으면 됐는데,
그날 병원에서 무슨 바이러스를 묻혀 왔는지 내 입이 먼저 움직였다.
"괜찮아요. 아직 입금 안 하셨으니까 잘 판단해서 하세요. 저는 괜찮아요.
계약하고 싶은 집으로 하셔야죠~."
남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 어… 중개사님한테 죄송하잖아요. 사실 그 집이 월세가 10만 원 더 싸긴 하는데…"
"네, 괜찮습니다. 더 조건이 마음에 드는 집으로 하셔야죠."
그러자 남자가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감사하다는 말을 남긴 채 비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헐. 그렇다고 진짜 가냐?
몸은 의연했는데 머릿속은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다.
양콩 A: 헐 진짜로 감? 너 미친 거 아님? 손님이 거절했는데 네가 왜 괜찮다 그래?
양콩 B: 하필 입금 직전에 전화가 와서 좀 민망했잖아…
양콩 A: 임대인한테 뭐라 말할 건데? '제가 오지랖 부려서 보냈어요' 할 거야?
양콩 B: 월세니까… 뭐… (월세는 업무량은 많은데 보수는 낮다…)
양콩 A: 그럴 거면 휴가니까 못 본다고 하지 왜 비 뚫고 달려와서 컴퓨터 켜고 난리야?
양콩 B: 아니, 내가 아니라 손님이 이상한 거지. 지조가 있어야지.
양콩 A: 지조? 손님이 지조로 사냐? 좋은 물건으로 가는 건 당연하지!
임대인에게 바로 전화해 계약 불발 소식을 알리고 새로운 손님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커피만 홀짝거리며 씁쓸함을 정리하는데도 마음이 뒤숭숭했다.
막 일어서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리고 그 남자의 번호가 떴다.
"중개사님 죄송해요. 그냥 그 집으로 할게요. 아까 그 계좌번호 좀 다시 찍어주세요."
"…네?"
"돌아서 오는데도 계속 찜찜하더라고요. 중개사님한테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근데 와서 보니 집이 생각보다 별로예요. 방이 너무 작아서 행거도 못 놓겠고요.
우리가 인연인가 봐요. 계좌 주시면 바로 송금할게요. 우리가 인연인가 봐요"
그래, 맞다.
손님과 중개사로 만난 그 자체가 인연이지.
바로 계좌와 계약 문구를 보내고, 5분 후 입금 확인 메시지를 받았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했다. 음치인데도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앞으로는… 오지랖 좀 덜 부리고 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