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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개사의 천태만상 현장일기(30)

오지랖 중개사의 최후

by 양콩

늦은 계약이 끝나고 퇴근하려는데, 아는 중개사님이 불쑥 들어왔다.

두 살 많은 남자중개사인데 10년째 같은 모임을 하고 있어 막역하다.


"속상한 일이 있는데 좀 들어줘~"


그는 커피 한 잔을 후루룩 들이키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2주 전에 20년 차 오래된 빌라의 월세 계약을 했다.

임차인이 미리 이사 나가서 공실 상태인데, 가구들 몇 가지를 두고 가면서

'필요한 건 쓰고 필요 없는 건 버려달라'라고 하더란다.


이사 올 사람은 임신한 젊은 부부인데 미리 와서 필요한 거 골라보고 나머진 버린다 하길래,

어제 마침 그 앞을 지나가다 들러보았다.


짐들은 거의 다 치워져 있고, 현관 앞에 철재로 테두리 된 전신 거울과 커다란 사무용 의자가 놓여있었다.

의자도 전신거울도 흠집 없이 쓸만해 보였다.


그는 이사 들어올 임산부한테 전화해서 현관 앞에 놓인 전신거울과 의자를 사용할 거냐고 물어보았다.


"아니에요. 앞에 내놓은 건 다 버릴 거 같아요~"


그는 옳다구나~ 마침 사무실 의자도 오래됐으니 가져다 써야겠다 하고,

그 묵중한 의자를 4층부터 질질 끌고 내려와서 다시 100미터 넘는 사무실까지 낑낑대며 들고 왔다. (오래된 4층빌라라 엘리베이터가 없으니..) 오래간만에 비지땀도 흘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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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무실에 원래 있던 의자는 필요한 사람 가져다 쓰라고 써붙여서 사무실 앞에 내놓았다..


스스로 저질 체력임을 비웃고 한숨을 돌리다가 문득, 의자랑 함께 현관 앞에 놓여있던 철재 전신거울이 떠올랐다.


'하 그 크고 무거운 전신거울을 임산부가 계단으로 들고 내려오다 다치면 어쩌나..'


쓸데가 없을 수도 있는 걱정이 피어올랐다. 결국 그는 다시 빌라로 가서 4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커다란 전신 거울을 4층부터 조심조심 들고 내려와 빌라 모퉁이 재활용품 모아두는 데까지 힘들게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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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무실로 복귀하려다 보니 화장실이 급해졌다.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서 다시 4층까지 올라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글쎄 변기가 막혀 있더란다.


'아... 이사오자마자 변기가 막혀있으면 기분이 안 좋을 텐데...'


그는 급하게 뛰어내려와 근처 철물점에 가서 '뚜러뻥'을 사다가 더러운 변기와 사투를 벌이며 말끔히 뚫어놓았다. 그리고 좋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에 용용하게 사무실로 돌아왔다고 한다.


짝짝 짝짝


나는 박수를 쳐줬다.


"와 뭔가 쓸데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좀 뿌듯했겠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급 어두워졌다.


"아니 거기까진 괜찮았는데… 오늘 일이 터졌어."


오늘 아침, 빌라 세입자의 어머니가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고 한다.


"전신거울이랑 의자 어딨어요? 당장 가져오세요!!!

그거 버리는 게 아니라 닦아서 쓸 거였는데 왜 가져갔어요!!!!"


졸지어 도둑 취급을 받게 되자 놀라서, 다시 의자를 낑낑대고 들고 가서 4층까지 올려다 주었다.

그리고 얼른 원래 쓰던 의자를 내놓은 곳에 가보니 의자가 없었다. 벌써 누가 들고 가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철재거울도 다시 올려주려고 뛰어가보니, 거울만 빼놓고 테두리 철재는 그새 누가 벗겨갔더란다. 세입자 어머니에게 상황을 전달했더니,

'당장 철재값 내놓아라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냐' 고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그래서 거울 철재값으로 5만원 물어줬고 사무실 의자는 다시 샀어.

그 사람들 너무하지 않아?

내가 변기도 뚫어줬고 또 임산부 걱정해서 선의를 베푼 건데..

완전 짜증 나!"


ㅠㅠ.... 듣는 내가 더 짜증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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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중개사는 딱 중개만 하면 되지 왜 오지랖을~~.

도대체 그 빌라 월세 중개보수료가 얼마이길래

변기까지 뚫어주고 집기 치워준다고 그 난리를 치신 거유? "


월세 중개보수는 155.000원.

155.000원짜리 중개하고 10만 원어치 땀 흘리고!

변기 뚫어주고!

거울철재값 물어주고!

욕은 500만 원어치 얻어먹고!

의자 새로 사고!


힘들여 중개해 놓고 속상해지는 그런 일상이 아니라,

겨우 중개만 했을 뿐인데 기분도 좋아지고 고맙단 말이 따라오고 보람이 넝쿨처럼 굴러들어 오는

그런 고효율의 중개인생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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