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개사의 천태만상 현장일기(31)

007 가방을 들고 온 블랙맨의 정체

by 양콩

어느 날 저녁,

모처럼 TV를 보는데 여성이 혼자 길을 가다가 괴한에게 퍽치기당하고 보자기 씌어 끌려가는 끔찍한 사건이 방영되었다.

아 정말 갈수록 무서운 세상이야...

겁이 많은 나는 그 무서운 장면이 뇌리에 남아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당시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딸한테 급히 톡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웬 남자가 전화를 했다. 집을 보러 방문하겠다고 했다.
이 남자 손님은 며칠 전, 주변 아파트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내 블로그 글을 봤다며, 이왕에 집 사는 거 나를 통해 계약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던 사람이었다.

갑자기 방문하겠다 하여 약속을 잡으려니 마침 조건에 맞는 집이 연락이 안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원하는 집을 보시기 힘들 것 같다'라고 전달했더니 '그럼 다음에 갈게요' 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1시간 후에 다시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오늘 아니면 업무상 당분간은 시간을 내기가 힘들 것 같다며

"중개사님! 그냥 오늘 비어있는 집 구조라도 먼저 보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했다.
손님이 오늘 꼭 봐야겠다는데 거절할 중개사가 있으랴. 더구나 이미 다른 중개사무소 통해 집을 알아보던 중, 내가 쓴 글을 보고 굳이 나를 통해 하고 싶다는 호의를 보낸 손님인데...
더구나 그의 부드럽고 상냥하고 나름 간절해 보이는 말투에 나는 거절 못하고 방문하시라고 했다.

겨울이 시작되어서 빠르게 어두워진 시간에 드디어 그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 이 남자.... 뭔가 느낌이 쎄...하다.

까만 모자 / 까만 안경 / 까만 옷에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까만 007 가방...


(사진은 사진일 뿐... 오~ 잘생긴 택연님께 죄송...)

일단 20평대 매물을 하나 보여줬더니 늦은 시간이라 모두 잠옷차림으로 있어서 불편했던지.

"빈집은 없나요?"


라고 물었다

빈집은 없나요?

마침 남자 혼자 사는데 출장을 간다고 편히 볼 수 있게 비밀번호를 알려준 집이 있어,

그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내 머리는 전쟁을 시작했다.

까만 모자를 뒤집어쓰고 까만 안경에 턱수염, 까만 옷....
그리고 무슨 007 가방 같은 걸 굳이 옆구리에 끼고...
저 가방엔 도대체 뭐가 들어 있을까?
차에다 두고 오면 되지 왜 집 보러 가면서 저 큰 가방을 계속 들고 다니지?'

아... 두통... 나는 언제나 상상력이 너무 풍부해서 문제였다.

더구나 얼마 전 뉴스에서, 집 보러 온 남자가 빈집에 들어서자마자 강도로 돌변하여 여자 중개사 뒤통수를 때려눕히고 금품을 빼앗아갔다는 끔찍한 사건을 본 기억도 꿈틀꿈틀 되살아났다.

아... 저 007 가방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 것일까...

게다가 마침 전날 저녁에 여성이 퍽치기 강도를 당한 TV뉴스도 오버랩되어서 나는 정말 심신이 괴로워졌다.

결국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나는, 이미 퇴근한 중개보조원에게 톡을 보냈다.

'실장님. 제발 나를 잊지 말아 줘~~'



해당 호수 앞에 도착하자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힌 후 현관 쪽에 버티고 선 다음, 나는 말했다.

"아이구 주인분이 근처 마트에 잠깐 뭐 사러 가셨으니 금방 오시겠네요~
아까 본 20평대랑 구조는 똑같아요. 크기만 조금 더 클 뿐. 얼른 둘러보세요~"

그러자 블랙맨 혼자 집안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얼마나 꼼꼼히 보는지
방에 들어가서 안 나오더니 외쳤다.

"중개사님! 여기 좀 와보세요! 천정 도배가 울어요. 혹시 누수 있는 건 아니겠죠? "

당장 쫓아가려다 멈칫했다.

"아 그건 주인께 여쭤봐서 혹시 누수면 매도인 하자담보책임으로 처리해 드릴게요!"

한참 후 블랙맨이 나오더니 이젠 안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외쳤다.

"이 방도 도배가 많이 떠요~ 와서 좀 봐보세요 "

나는 이번에도 순간적으로 방으로 튀어 들어가려다 멈춰 서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 그래요? 아마 도배 정도는 새로 하셔야 할 거예요
도배비 정도는 조정해 볼게요."

아무튼 그런 식으로 나는 평소 동행하며 직접 하나하나 설명해 주던 거와 달리, 그렇게 현관 앞에 얼음처럼 서서 설명해 주었고, 드디어 그가 다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자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휴..

그날 밤 집을 많지도 않게 딱 두 개 보여줬을 뿐인데도, 나는 마치 42.195미터 마라톤을 뛴 저질체력 선수처럼 피곤했다.

뒤늦게 카톡을 확인한 중개보조원이 걱정이 되는지 전화를 해대도 옆에 손님이 있으니 차마 받지도 못하고 톡으로만 응답했다.





블랙맨은 사무실로 돌아와 커피를 청하더니, 두 번째 본 집이 마음에 든다며 도배 얼룩진 부분의 누수 여부 확인과 매매대금 조정을 요구했다.
매도인한테 전화해 전달하려 했는데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전화가 꺼져있다 했더니 그가 말했다.

"아까 근처 마트에 가셔서 곧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곧 오시겠네요? 잠깐 기다리죠 뭐"

임시방편의 거짓말이었는데.... 기억력도 너무나 좋았던 블랙맨.
다행히 조금 기다리니 매도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매매대금 조정의 과정을 거쳐서 다음 날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는 매매 잔금 및 소유권이전 등기 시까지도 너무나 젠틀했고 항상 007 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가 예의 바르고 편하게 대해줄수록 나는 너무나 찔렸다. 단지 블랙 의상, 007 가방만 보고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며 경계했던 그 순간들이 죄를 지은 듯 미안했다.

그는 다른 곳을 통해 아파트 매매를 진행하려다 내가 쓴 글을 보고 일부러 나에게 찾아와 준 일종의 고마운 귀인인 셈인데, 전날 본 흉악한 뉴스에 쓸데없는 상상력이 더해져 그의 선심을 흉악범으로 뒤덮고 만 것이다.

나는 그에게 잘못을 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죄송하다고 여러 번 사과했다.
그리고 앞으론 쓸데없이 아무나 오해하고 의심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이 결심은 지키지 못할 것 같다.

어젯밤에도 집 보러 와서 여자중개사를 감금하고 금품을 앗아간 폭력범에 관한 사건이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나이 들면서 가장 무서운 건 역시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란 존재다.
TV를 끊어야 하나... 사람을 끊어야 하나~~ㅠㅠ




keyword
작가의 이전글중개사의 천태만상 현장일기(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