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개사의 천태만상 현장일기(36)

행복은 속도가 아닌 방향

by 양콩

30평대 월세 매물이 나왔다.

광고를 했더니 여러 손님이 다녀갔다. 그러나 계약이 될 듯 될 듯 안 되던 어느 날, 웬 남자가 전화하여 매물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고 1시간 후로 시간을 잡았다.


시간에 맞춰 아파트 해당 동으로 걸어가는데 승용차가 와서 멈추고 조수석에서 남자가 내렸다. 남자는 차문을 연 채로 서서 나에게 물었다.


"중개사님이신가요?"


인사한 후 매물이 있는 동을 가리킨 다음, 나는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래 잘 됐다 하고 버튼을 누르고 서서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남자가 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왜 이리 늦어. 월세 보는 손님이 아니었나?'


결국 엘리베이터를 놓아주고 다시 건물 밖으로 나가 둘러보니 그가 아직도 걸어오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비척비척… 그 뒤에 연세 드신 아주머니가 서서히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순간이 멈춘 듯 기다렸고, 느리게 걸어오는 그들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안을 둘러보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느린 것과 달리 남자의 표정은 밝고 경쾌했다. 모친인 아주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집의 구조나 상태보다는 창밖의 풍경에 더 많이 집중하고 감탄하며 화목한 대화를 나누었다. 심지어 식탁 위에 놓인 모 트로트 가수의 굿즈를 보며, 그 트롯 가수에 빠져 모든 콘서트를 쫓아다니던 지난 추억 이야기로도 장단이 맞았다.



여느 때 같으면 집을 둘러보는 것과 관련 없는 수다가 길어지면 조금 지루하고, 간혹 짜증스러워질 때도 있는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나도 덩달아 여유가 생기고 마음의 길이가 느슨해졌다. 거실에서 방으로, 방에서 다시 발코니로 느리게 이동하는 그들 뒤를 나도 느리게 쫓아다녔다. 혹시나 그들의 부자연스럽고 느린 속도를 내가 불편해한다고 여길까 봐 일부러 더 많은 여유를 부렸다.


집에서 나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주차장의 승용차를 향해 돌아가는 길도 더디고 멀었다. 그들은 앞서 걷는 내 뒤를 천천히 따라오며 집 보러 가서 같은 트롯 가수 팬을 만난 이야기, 그리고 거실 창 너머로 멀리 보이는 야산에 등산 갔던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그런 저런 이유로 이 집이 마음에 든다며 이사 날짜를 조정해 연락하겠다 하고 돌아갔다.


다음 날 입주 날짜가 조정되어 계약을 하기 위해 다시 만났다. 남자 명의의 계약이었지만 역시 어머니도 함께 와서 즐겁게 대화했다. 아들인 남성은 옆에 서서 계속 이야기를 했고, 모친은 장단을 맞추다 아들 대신 도장을 찍고 대리 서명을 했다. 덕분에 보통의 계약보다 두 배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모습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래서 말했다.


"모자간에 이렇게 대화도 잘하시고 함께 즐겁게 다니시는 모습이 아주 특별하고 보기 좋네요."


어머니가 말했다.


"쟤는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 결혼도 못 했어요. 그냥 같이 살아요.”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그들 모습처럼 즐겁지만은 않았다.


아들은 초등학교 시절 학교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상태가 되었다. 어머니 말로는 입만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끝에 어느 날은 손가락을 움직이고, 어느 날은 돌아눕고, 마침내 일어나 조금씩 걷게 되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회복이 더뎌 손발이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줄 알았던 아들의 회복과 변화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삶이 되었다고 했다.


그 뒤로는 어느 누구의 인생도 부럽지 않고, 그 어떤 소망도 욕심도 없어졌다고 했다. 그냥 아들과 함께 수다 떨고 맛집 찾아다니며, 일심동체처럼 함께 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했다.


"다른 자식들도 있지만, 커가면서 다 부모 품을 벗어나잖아요. 결혼하면 남의 집 자식이 되고 얼굴 보기 힘들어지고요. 그런데 이 아들은 평생을 나와 함께 하며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끔찍했던 과거를 잊게 해주며 이렇게 즐거운 친구가 되었어요.”


어머니의 이야기는 내게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갈피마다 표시해 두고 책장 한가운데 오래 보관하고 싶은 책.


“사람 많은 곳에 공연을 보러 가도 장애인석은 늘 여유가 있어요. 장애인으로 사는 게 부끄러운 일도, 나쁜 일도 아니에요. 그 속에는 또 다른 혜택과 행복이 있더라고요. 우리의 오늘은 불행이 아니라 또 다른 행복이에요. 매일매일 한 몸처럼 다니며 정말 즐겁게 살고 있어요.”


중개업을 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한때의 불행과 과거의 아픔이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희망으로 바뀐 이런 가족은 처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과거를 비교하고, 현재를 재단하고, 미래를 계산한다.


그들은 세속에 물든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불행은 상황이 아니라 ‘해석’이고,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태도’라는 것.

한때의 아픔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상처가 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 깊은 감사와 행복의 뿌리가 된다는 것.


아무리 끈끈하던 부모와 자식도 성인이 되는 순간 남보다 멀어지기도 하는 현실에서, 그들에게는 사고로 맞이한 장애라는 결핍이 오히려 특별한 행복의 조건이 되어버린 듯했다.


인생이라는 것, 인생의 행복이라는 건 참 마음먹기 나름이다.


나는 계약을 마치고 다시 느린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세상보다 느리지만 가볍게 걸어가는 두 사람.

마치 오래된 리듬을 공유하듯,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함께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행복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 속의 소소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그 변화에 적응하거나 앞질러 가는 것이 성공이라 여겨지는 세상에서, 후퇴하는 듯 보여도 천천히 걸으며 남들이 스쳐 지나가느라 놓친 것들을 음미하며 사는 것. 그것이 그들이 발견한 삶의 미학이 아닐까.


넘어졌던 시간도, 멈췄던 시간도, 돌아가야 했던 길도 그들은 언제나 ‘함께’였기에 상처가 아니라 이야기가 되었고, 불행이 아니라 추억이 되었다.


행복은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끝까지 손을 놓지 않고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빠르지 않아도 된다.

남들보다 늦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멀리 왔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 같은 쪽을 향해 가고 있는가다.


그날 나는 알았다.

행복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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