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금 전쟁과 중개사의 복수
"오~ 여기 중개사님, 일도 잘하시고 성격도 너무 좋아 보이네요."
요리를 오래 하면 음식이 나오기 전, 냄새만으로도 맛이 그려진다.
농사를 오래 지으면 새싹만 보고도 풍작인지 흉작인지 감이 온다.
중개 일도 오래 하다 보면 나름의 감각이 생긴다.
말투 하나, 눈빛 하나만 봐도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 거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대충은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만든 나름의 기준이 있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친절하고, 접대성 말이 많은 사람은 조금 경계하게 된다.
그 '과도함'은 대개 결정적인 순간에 좋지 않은 결말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인근 도시에 산다는 오십 대 후반의 박 씨는 처음 집을 보러 온 날부터 유난히 친화력이 넘쳤다.
만나자마자 나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고, 본인 이야기도 쉼 없이 흘러나왔다.
말이 장황한 듯 빠르고, 분위기를 주도하려 애를 썼다.
늦은 밤 집을 본 뒤 전세 계약을 했다.
한 달 후 입주 조건이었는데 보름쯤 지나 갑자기 이사를 못 들어가게 됐다는 연락이 왔다.
처음엔 그냥 계약금을 돌려줄 수 없느냐 물었고, 안된다 했더니 그러면 빨리 새 임차인을 구해서
계약금을 반환받게 해 달라는 요구였다.
잔금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계약금을 되돌려 받으려면
일단 잔금을 치르고, 그 후 다시 임차인을 구해 보증금을 반환받는 방식이 최선이라는 데 합의했다.
드디어 잔금 날.
잔금 시간은 박 씨 요구로 오후 두 시로 잡았는데, 오전 열한 시경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임대인 할머니가 고향에 다니러 갔다가 그만 몸져누우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딸이 대신 나온다는 말이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위험 감지기가 작동했다.
이 계약은 담보대출 일부 상환 후 감액등기 조건이었고,
감액등기는 소유자 본인이 은행에 직접 접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 오늘 난리 나겠구나.'
지방에서 누워계신다는 할머니를 단시간에 부를 방법은 없었다.
딸이 나왔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박 씨는 잔금을 거부하며 소란을 피웠다.
"부동산이 전부 책임진다는 각서를 쓰면 그때 잔금 치르죠."
상황 수습이 먼저였다. 책임진다는 각서는 쉽게 쓰면 안 되는 것이지만,
여러 번 거래하며 신뢰를 쌓아온 임대인이었기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지겠다는 각서를 써줬다.
그런데 각서를 내밀자마자, 박 씨는 다시 돌변했다. 각서를 쭉쭉 찢어 던지며 말했다.
"각서도 소용없어요.
임대인이 직접 와야 잔금 치릅니다."
그리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사무실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사 나가는 세입자, 그 세입자가 매입한 집의 매도인, 은행 직원, 법무사까지. 모두 난감한 표정으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모든 계약은 대개 줄줄이 엮여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느 한 계약이 틀어지면 연쇄적으로 피해가 발생한다.
결국, 5시간 거리 지방에 몸져누운 할머니를 소환했다.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셔야 했다. 도착 예정 시간은 밤 9시 반.
시간은 잔인했다. 뒤이은 매매 잔금이 늦어지면 대출은 취소되고 계약은 연쇄 붕괴될 상황.
그때부터 박 씨의 말은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오늘 안에 감액등기 접수 안 되면 배액배상받고 계약 해제할 겁니다."
감액등기는 본인이 직접 접수해야 하는데 임대인 할머니가 은행 업무 시간 안에 도착하는 건 불가능했다.
박 씨도 물론 그걸 알고 있었다. 입주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계약금만 돌려받고 싶었지만 뜻대로 안 되자,
임대인이 못 오는 이 상황을 이용해 배액배상까지 받고 끝내려는 계산이었다.
사무실은 멘붕 상태였다. 전세팀, 매매팀 여섯 명이 말없이 나만 바라봤다.
중개보조원이 보이지 않아 둘러보니 밖에서 박 씨를 붙잡고 사정하고 있었다.
그 순간, 오기가 났다.
'그래. 해보자!'
20년 넘게 쌓은 인맥을 총동원했다. 은행, 법무사, 가능한 모든 루트를 두드렸다.
그리고 은행 마감 15분 전, 정말 이례적으로 본인 없이 감액등기 접수가 이뤄졌다.
접수증을 보여주자 박 씨 얼굴이 굳었다.
자신도 어디선가 중개보조원으로 일했던 경험이 있는데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며 위조 아니냐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리고 은행에 직접 전화해 확인까지 했다. 정상 접수인 것이 확인되자 또 말을 바꿨다.
"전입신고 해야 하니 동사무소 업무 마감 전에 임대인이 안 오면 계약 깹니다."
어떻게든 계약을 해제하는 것이 목적이다 보니 갈수록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처음엔 중개사가 책임진다는 각서면 된다고 하다가 각서 써주니,
다시 감액등기만 접수되면 잔금 치르겠다더니 또 말을 바꾸십니까?
전입신고는 임대인 도착 여부와 무관합니다. 지금 가서 전입신고 하세요.
그리고 오늘 자정 안에 임대인 도착하면 그걸 이유로 계약 해제 못 합니다.
그 시간에 임대인 나타났는데 잔금 안 치르면 이제 계약금 몰수하고 계약해제 하겠습니다."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웅성거렸다.
"진짜 너무하네요."
공기는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다. 민망해진 박 씨는 또다시 말없이 나가버렸다.
결국 뒤에 이어진 매매 건은 부동산이 책임지는 조건으로 잔금 미지급 상태에서 마무리했다.
밤 9시 반, 임대인 할머니가 터미널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악재. 편찮으신 상태에서 급히 오느라 어디선가 신분증이 든 지갑을 분실하셨다는 것이다.
밤 10시 반, 모두 중개사무소에 모였다.
신분증이 없다는 사실을 알자 박 씨는 다시 비웃으며 나에게 또 각서를 요구했다.
그때 할머니가 말했다.
"이 중개사가 무슨 잘못을 했소. 칠칠치 못한 내가 책임질 일이오.
근데 나도 부동산 계약 많이 해봤는데 젊은 사람이 참 너무하요."
이사 나가는 세입자도 결국 참지 못했다.
"계약하고 변심해서 못 들어오게 됐으니 어떻게든 깨고 싶은 거잖아요.
해도 해도 너무하네요 진짜."
나는 말없이 할머니 가방을 뒤졌다.
할머니 명의의 통장, 영수증, 본인만 가질 수 있는 자료들을 하나씩 꺼내 박 씨 앞에 내밀었다.
"본인 확인을 주민등록증으로만 하라는 법이 있습니까?
이 정도 자료면 본인 확인은 충분합니다. 일단 잔금을 치르고, 만약 소유자가 아니라면
그 책임은 내가 지겠습니다"
밤 11시 반. 길고 치열했던 전세 잔금이 끝났다.
긴장이 풀리자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무실이 또 한 번 술렁였다.
집 현관에 들어서자 핸드폰이 울렸다. 박 씨였다.
"잔금이 늦어져서 막차 놓쳤어요. 택시비라도 대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중개 일을 하다 보면 이렇게까지 하며 살아야 하나 싶은 날이 있다.
중개사는 계약서 한 장 쓰고 끝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변심과 공포, 욕심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자리에서도
끝까지 남아 결국 해결해 내야 하는 사람이다.
"뚝"
나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였다.